트라이앵글의 변주
트라이앵글의 변주
  • 승인 2019.01.21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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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시인)
일주일도 금방 다시 금요일이다. 청춘의 불타는 금요일이라 하듯 마감을 코앞에 둔 나는 목이 바짝 마르고 속이 타들어 간다. 컴퓨터 앞에 앉아만 있다고 글이 술술 풀리는 것은 아니다. 잠시 집밖을 나와 나뭇잎 떨어져 쌓인 근린공원을 찾았다.

처음처럼, 낯설지만 뫼비우스의 띠 같은 익숙한 계절 앞에 서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 제각기 다른 모양으로 헐벗고 선 나무들을 보면서 생의 겨울을 마중물처럼 쏟아 부어 본다. 단풍나무, 벚꽃, 화살나무 등 적절하게 물이 잘 배였다 흩어지고 사라진 지금, 홀몸으로 선 채 떠나보낸 잎들을 떠올리며 걷는다.

높고 푸르렀던 것들을 버리고 스스로 뛰어내려 생의 가장자리로 몰려가 옹기종기 햇볕을 쬐고 있는 낙엽들, 제대로 물들어 보지도 못하고 가지 끝에 달린 그대로 메말라버린 이파리들, 바닥인지 허공인지 매달린 기억조차 잃어버리고 바람이 부는 데로 온 몸 내 맡긴 채 허우적거리고 있다.

밖으로 나온 김에 은행에 들러 자동화기기에 통장을 넣으니 ‘다음 페이지에 인자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글씨가 찍혀 나온다. 폰뱅킹으로 은행 업무를 보다보니 미처 챙기지 못한 여백이 아직은 많이 남아 있는 줄로만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랜 시간 통장정리를 미루어놓은 탓에 쓰던 통장 표지까지 모두 인자하고도 모자라 새 통장을 발급받아야 한다고 했다. 직원이 새 통장을 내어주며 헌 통장 뒷장에 눌어붙어 있던 기억의 자석을 떼어 내고 구멍을 뚫어 폐기처분하라고 하는 순간 은행 안이 온통 시끌벅적해졌다.

할머니 한 분이 서너 시간 째 구멍이 숭숭 뚫린 헌 통장을 들고 와서는 돈을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빨리 내 돈 주소 제발. 집에 빈손으로 들어가면 우리 영감한테 내가 맞아 죽어요. 이자 많이 준다고 살살 달래가며 꼬실 땐 언제고, 그 때 그 아가씨는 도대체 돈 안주고 어디로 내뺐노. 배고파 죽겠는데, 참말로 내 죽겠네.”

은행을 찾은 고객들이 실랑이를 견디다 못해 한마디씩 거들 때마다 할머니는 철없는 어린아이처럼 막무가내로 떼를 쓰고 있었다.

“내가 안 묵고 안 입고 한 푼 두 푼 우리 아들 줄라꼬. 우째 모은 돈인데. 여측없다카이. 이적지 돈 한 푼 잃어본 적 없구마. 번번이 올 때마다 잘해주고 해서 믿고 넣었는데, 빨리 내 돈 좀 주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또 다른 고객이 ‘할머니 혹시 치매 아닌가요.’라고 물었다. “내가 먼 치매라꼬 그라노. 속에 천불나는 소리 하지 마라카이. 속 모르는 아줌마나 나가소. 경찰 부르소. 내는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다카이.”

폐기처분하라는 통장에 숭숭 뚫려 있는 구멍들처럼 할머니의 기억에도 그렇게 구멍이 뚫려 있었다. 부디 세상에 지지 말기를. 그녀의 인생 3막을 응원하며 다시 거리로 나섰다.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

투병과 요양을 이겨내고 새롭게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는 최승자 시인의 ‘내 청춘의 영원한’이라는 시를 가방 속에서 꺼내 읽었다. 시를 빗어내는 시인의 마음에 아주 순순하고 독기 품은 농도의 계절이 있었다면, 아마 이 시는 아주 독하게 쓴 시에 속할 것이다. 남들보다 특별히 더 아프고 격정적인 삶을 살았던 시인, 자신의 인생을 재물로 바쳐 얻어낸 문장들이었을 꺼라 생각하니 시인의 아픈 육성 같아 한 줄 한 줄, 행과 행, 연과 연 마다의 능선이 아닌 계곡 같은 삶이 예사롭지 않다.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시인의 청춘 트라이앵글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니 백석 시인이 말한 외롭고 높고 쓸쓸한 표현이 또 한 겹 더해진다.

세 꼭짓점에 갇혀 어느 하나 만만한 것 없겠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삶이 힘겹지만 또한 빛나고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하는 삶의 역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좋은 일도 힘들거나 나쁜 일도 트라이앵글처럼 모든 생의 끝에서 시접을 맞추면 결국 같아진다던 누군가의 말이 부표처럼 떠오르는 일월, 첫 달의 하루가 가까스로 저물어가는 골목마다 가로등 켜든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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