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을 어르신 27명 단체 옥고…‘도진리의 전설’로
한마을 어르신 27명 단체 옥고…‘도진리의 전설’로
  • 배재욱
  • 승인 2019.02.10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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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박씨 집성촌인 도진리
임진왜란 때도 왜군에 항거
지역 대표 독립운동마을 꼽혀
당시 3일간 펼쳐진 만세운동
마을사람 입으로 전해져오다
2005년 법원기록서 밝혀져
도진마을
고령군 우곡면 도진마을 전경.

 

 
 

3ㆍ1운동 100주년 배재욱의 대구 ㆍ경북 역사기행 <2> 고령

고령군 우곡면 도진리를 방문한 날은 2019년 1월 2일이었다. 대구를 출발해 배위량 선교사가 청도에서 팔조령을 넘어 대구로 들어간 것을 기념해 청도 기독교 연합회에서 세운 청도기독교100주년 기념비를 본 뒤에 도동서원을 거쳐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 곽재우 장군의 묘소를 둘러본 후 우곡면 도진리로 향했다.

대구에서 50여 km 거리에 있는 고령은 대가야의 도읍지로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다. 가야 시대에는 대구의 옛 지명인 달구벌이 대가야의 동쪽 변방이었다. 대구가 경상도 지역의 행정 수도로 정해진 뒤 고령은 대구의 접경한 이웃 도시지만 전형적인 농촌 지역이다.

대가야는 520년 동안(A.D.42~562) 번성한 국가로 김해를 중심으로 한 금관가야가 신라에 멸망 당한 뒤 가야 연맹의 맹주로서 가야의 연맹체를 이끈 나라였다. 대가야의 도읍지였던 대가야읍에 많은 기념물들이 산재해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대가야 시대의 고분군과 주산성 그리고 고아동 벽화고분이다.

지산동 고분군은 대가야 유적의 대표로서 200여기의 고분이 밀집돼 있다. 고분군 위쪽 동쪽 구릉에 석축으로 견고히 쌓은 산성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이 산성은 대가야시대의 대표적인 산성으로 내성과 외성이 이중으로 성을 이루고 있다. 현재 존재하는 산성의 전체 길이는 1천351m이다.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고아리에는 대가야시대의 유일한 벽화인 고아동 벽화고분이 존재한다. 대가야읍 뿐만 아니라 고령군에는 고분군이 군데군데 산재해 있다. 개진면 양전리에는 알터 암각화가 있고 우곡면 사촌리에는 청동기시대의 지석묘가 존재한다.

 

우곡면사무소
고령군 우곡면사무소. 1919년 4월 6일과 8일 두 차례 만세운동이 벌어진 곳이다.

고령에서 3.1운동은 세 곳에서 일어났다. 덕곡면, 쌍림면, 우곡면이다. 그중에서도 우곡면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은 농민이 중심이 돼, 도진(桃津)이란 한 마을에서 고령박씨 문중을 중심으로 일어난 독특한 운동이다.

필자가 어릴 적 자란 사촌리 황성 마을에서 5km 정도 낙동강 지류인 회천을 따라 내려가면 도진마을이 있다. 그 당시에 다닌 초등학교는 고령군 우곡면 도진리에 있었다. 도진리는 우곡면 소재지에 있는 큰 마을로 10여 호가 있었던 필자의 고향 황성 마을보다 훨씬 큰 마을이었다. 당시엔 책 보따리를 어깨에 두르고 먼 거리를 걸어서 학교를 다녔는데 도진에서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면 도진마을이 있었고, 도진마을 제일 안쪽 산기슭에 도진초등학교가 있었다. 도진초등학교는 당시 각 학년에 두 반씩 있었고 한 반에 60여명씩 있었으니 적어도 700명 이상 재학생을 가진 큰 학교였다. 하지만 농촌 인구 감소로 1996년 9월 1일에 우곡초등학교 도진분교가 되었다가 2013년 3월 1일에 문을 연 우곡초등학교로 통폐합됐다.

도진의 3.1운동에 대해서는 우곡제일교회 정규삼 목사의 도움으로 몇 가지 문헌을 구해 볼 수 있었다. 3.1운동 당시 도진마을에도 그 여파가 밀려와 마을 주민 30여 명이 3.1만세 운동에 참여해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그 후 재판에 넘겨져 27명이 단체로 옥고를 치렀다.

고령박씨의 집성촌인 우곡면 도진마을은 고령군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마을이다. 도진은 1350년 고려말에 개척된 마을로 ‘회천’(會川) 또는 ‘금천’(錦川)으로 불리는 ‘모듬내’가 휘감아 흐르는 강변이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나오는 무릉도원처럼 아름답다 하여 ‘도원’(桃源)으로 불리다가 1500년경부터 그곳에 있는 나루터 때문에 ‘도원의 나루터’ 즉 ‘도진’(桃津)이란 지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도진은 임진왜란 때는 의병이 일어나 인근에 왜군에게 항거한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이 마을 사람들은 기미독립운동에 동참하여 만세 운동을 일으켰고, 6.25동란 때에도 무공훈장을 받은 사람을 배출한 마을로 1997년 7월 13일에 경상북도에서 제일 처음으로 경상북도지정 충효마을이 됐다. 2007년에는 농촌건강 장수마을로 지정됐다.

여러 지역의 3.1운동은 종교계와 연결되어 있거나,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과 직접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 우곡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은 지역 농민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독립운동이란 점에 특징을 가진다.
 

도진충효마을표지석
도진 충효마을 표지석.

우곡에서 일어난 3.1만세 운동은 이렇다. 경우곡면의 박재필은 노경익의 고용인 박영화 박차전과 함께 만세 시위를 계획했다. 그들은 1919년 4월 6일 오후 11시경에 우곡면 도진리에서 동민 약 30명을 모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시위를 벌였다. 마을을 한 바퀴 돌며 만세를 무른 시위대는 우곡면사무소 앞으로 몰려가 만세 시위를 전개했다.

4월 7일 일본경찰은 도진으로 와서 동민들을 협박하면서 주동자인 박재필, 박영화를 구타한 후 구금했다. 이에 도진에서는 그 다음날인 8일에 2번째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1919년 4월 8일에 일어난 2번째 도진의 만세운동은 박채환이 앞장섰다. 당시 고령경찰이 우곡면사무소에 군중을 모아 놓고 시국강연회를 열어 협박, 회유하였으나 박채환은 동민들을 이끌고 만세시위를 펼쳤다. 박채환이 체포되자 석방을 요구하는 만세 시위가 이어졌다.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확산되자 일본 경찰을 경찰관 수십명을 동원해 만세운동에 참여한 주동자는 물론 주민 모두를 연행, 대구형무소에 수감했다. 당시 40가구였던 도진리 마을에 어른들이 없어졌다는 말이 전해올 정도였다. 마을의 모든 성인들이 만세운동에 가담했고, 일본 경찰에 연행됐기 때문이었다. 우곡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은 도진리 마을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 내려오다가 2005년 국가자료원이 일제강점기 법원기록을 전산처리하는 과정에서 밝혀졌다.

도진리 만세 운동은 한 마을 사람들을 중심으로 문중 차원에서 3일간 펼쳐진 운동으로, 독립운동사에 보기 드문 사례다. 연행된 주민 가운데 박재필, 박채환, 박기로 등 도진리 주민과 이웃 마을 주민 등 모두 27명은 재판에 넘겨져 그해 5월 대구지방법원에서 박재필은 징역 1년 6월, 박채환, 박기로, 박영화는 징역 1년을 나머지는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도진에서 약 3km 가량 고령방향으로 올라오면 첫 마을이 순천박씨와 고령신씨의 집성촌인 사촌리인데, 사촌리에는 독립운동가 신철휴의 흉상이 서 있다. 그는 1919년 9월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인물로 김원봉·곽경·양건호·서상락·한봉근·김옥·이성우·윤소룡 등과 같이 파호내외에서 의열단을 결성하고 결사대원으로서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는 1927년에 조직된 신간회 간부와 조선중앙일보 지방지국장으로도 활약했다. <영남신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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