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 심각했던 조선, 노비도 출산전후 100일 유급휴가
고령화 심각했던 조선, 노비도 출산전후 100일 유급휴가
  • 이대영
  • 승인 2019.02.13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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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5천년 역사에 937회 외침
잦은 전쟁에 각종 질병·성병 창궐
사대주의 위해 대리전쟁 하기도
젊은이는 다 죽고 늙은이만 남아
세종때 저출산·일자리 위기 겹쳐
혼례비용 조달·여승방 폐지 등
출산장려 위해 획기적 정책 실시
숙종때 간도 등 간척사업 추진
사민정책 통해 백성 일자리 마련
신택리지-보릿고개
보릿고개 시절.

 

이대영의 신 대구 택리지 (7)민생은 경제고 바로 일자리야!

2010년 12월 24일 18시경 중국 상하이 홍지아빤디엔(虹橋飯店) 지하식당에서 20대 젊은 여성이 어깨가 축 처진 채 남들이 난장판을 만들어 놓은 식탁을 깨끗이 청소하고 있었다. 메리 크리스마스(快樂聖誕節)에 모두가 들떠있는 분위기와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고달픈 삶의 무게가 나에게까지 고스란히 전달됐다. 동작은 80세 할머니의 속도, 그저 안쓰럽고 딱해 일어나 옆으로 나가갔다. “수고 많으십니다. 굉장히 값진 일을 하고 계십니다”라고 했더니,“예, 당신 뭔 말씀했어요”라는 반응이다. “지금 아가씨가 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이곳은 10분도 지나지 않아 음식물 냄새와 쓰레기로 엉망진창이 될 것입니다. 제가 보기는 아가씨가 하시는 일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묵묵히 일하심에 감사와 존경을 드립니다”라고. 갖고 있던 관광안내서 한 모퉁이를 하트모양으로 찍어서 “감사합니다. 축복을 드립니다”라고 메모를 전하면서 세상엔 하찮은 일 하나 없음을 다시 느꼈다.

◇간절히 원컨대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1992년 상영한 미국영화 ‘파 앤드 어웨이(Far And Away)’에 1886년 당시 주인 없는 황야를 먼저 차지하고자 말 달려 깃발을 꽂아나가면서 자기 땅을 확보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런 걸 국제법(민법)상 ‘무주물선점의 원칙( occupancy principle)’이라고 한다. 옛말이 아니라 오늘날 경제영토에도 적용되고 있다. 물론 옛날에도 동물세계의 영역표시, 조직폭력배 사회에서도 통용되는 세력권(なわばり)이 있다. 하늘을 나는 새들도 i) 천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避敵), ii) 한 눈에 먹거리를 확보할 수 있고(生利), iii) 안전하게 알을 낳을 둥지를 뜰(作巢)기 위 적합한 나무를 선택(擇木)한다.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잡는 걸 택리(擇里) 혹은 복거(卜居)라고 한다. 복(卜)자는 무당임을 알리는 긴 장대(깃발)를 뜻하지만 “내 땅이다”라고 꼽는 깃발이다. 점거(占居)에서 점(占)이란 적을 없애고 그들의 무덤 위 혹은 평화의 재단 위에 깃발을 세운 모양이다. 오늘날 의미로는 이곳에 살아보겠다는 의지의 깃발을 꽂고 삶의 터전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렇게 터전을 잡는 것은 사람이란 생명체로 살아가는 가장 간절함으로 일용할 양식(daily bread)을 얻기 위함이다.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 복거론(卜居論)에서도 i) 물길과 수리, 산세, 토질의 비옥 등 지리적 여건(地理), ii) 생명체로 먹고 살 일용할 양식의 생산과 거래(生利), iii) 지역사회의 인심, 질서 및 문화, 교육 등의 인위적 여건(人心)을 고려했다. 이 가운데 맹자는 “천시(天時)가 아무리 좋아도 지리적 이점(地利)만 못하고, 지리적 이점도 인화(人和)만 못하다”고 했다. 물고기에 비유하면 인간이 살기 좋은 곳은 바로 ‘물 좋은 곳’으로 적이 없고, 먹거리가 풍부하고, 알 놓기 좋은 곳이다. 이런 곳이 바로 인간이 꿈꿔왔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land flowing with milk and honey)’이다.

여기 인간이 사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화합의 화(和)자는 먹을거리(禾)를 가운데 놓고 모든 사람(口)들이 불평불만 없이 골고루 나누는 모양을 형상하고 있다. 아마존 밀림의 원주민들도 화합을 위해서 아무리 작은 것도 불만 없이 나누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정치다. 2005년 상영한 우리나라 영화 ‘웰컴투 동막골’에서 “정치가 별 것인가요? 백성들이 싸우지 않고, 나눠 배불리 먹이는 게지요”라고 했다. 배터지도록 먹이는 것이 아닌 노력과 역할 등을 고려해 골고루 나눠먹는다. 이것이 바로 세상을 경영해서 백성을 구함(經世濟民)이며, 오늘날 경세제민(經世濟民)을 줄여 경제(economy)라고 한다.

◇보릿고개(麥嶺) 넘다가 다 죽었다

대원군이 60여 년간 세도정치(勢道政治)로 피폐한 국정을 보고 절대로 유력사대부에게 말려들지 않겠다고 권문세족이 아닌 집안에서 간택한 며느리 고종왕비 명성황후(明成皇候)를 봤다. 간택을 시아버지가 눈으로 확인하고 심덕(心德)을 간파하고자 질문을 던졌다. i) 조선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 무엇이고, ii) 조선에서 가장 높은 고개가 무슨 고개인가를 물었다. 여흥(驪興) 본관 민치록(閔致祿)의 딸 민자영(閔玆暎, 1851~1895)은 “엄동설한에 백성들의 추위를 막아주는 목화(木花)입니다.” 그리고 “춘궁기를 넘기고자 많은 백성들이 죽으면서 넘는 보릿고개라고 생각합니다.” 속마음을 꿰뚫는 대답을 두 귀로 들은 대원군은 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한민족 5천년 역사 속에 937회의 외침을 받으면서 우리나라는 단일민족이란 명맥만은 유지해왔다. 어떤 시련에서도 국맥이 끊이지 않았고 이어왔다. 매번 전쟁으로 인한 전쟁질병인 성병이 창궐했고, 성한 젊은이는 싸움터에 나가서 다 죽고 늙은이만 살아남았다. 오늘날 용어로 고령사회다. 당장 먹을거리도, 일할 터전도 없었던 위기를 몇 차례나 극복했다. 속된 말로 입에 풀칠을 하고자 몽고를 대신해서 일본원정도, 상전국가 대명(大明)을 위해 대마도 정벌도, 심지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사대주의(事大主義)를 위해 대리전쟁도 자초했다. 심지어 국력이 약하다 보니 찍소리도 못하고 청일전쟁(淸日戰爭)과 러일전쟁(露日戰爭)의 싸움터로 한반도를 내주었다.

가장 가슴 아픈 일은 일본 왜구(倭寇)가 신라 때부터 조선말기 때까지 우리 백성을 잡아다가 일본과 해외노예시장에서 인신매매를 해서 축재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역사책에선 버젓하게 신라노(新羅奴), 고려노(高麗奴), 조선노(朝鮮노)라는 치욕의 용어를 쓰고 있다. 가장 큰 치욕은 임진왜란으로 50만여 백성을 확보했던 노예전쟁이다. 임진왜란 당시 좌의정 윤두수(尹斗壽,1533∼1601) 대감은 “왜병의 절반은 조선백성이다(倭兵半鮮民也)”고 했다. 조선백성이 왜병에 들어가 목숨대가로 연명했다. 근대역사에서도 1964년 9월부터 1973년 3월까지 연인원 50만 명을 베트남에 파병을 했고, 파병장병들의 급여로 조국근대화의 기반을 확보했다.

한편, 고려는 대외무역으로 이탈리아 베니스까지 통상을 했다. 당시 개송상인(松商) 유승업(Antonio Corea)은 경영의 블록체인(block and chain)이라고 할 수 있는 사개치부법(四介致簿法)를 그곳에 전달해 오늘날 경영회계학의 기원을 마련했다. 외국이민까지 받아들이는 추세정책(推刷政策)을 펼쳐 베트남 이씨왕조(1009~1225) 멸망 유민 리롱뜨엉(李龍祥)의 일족을 1226년에 받아들였다. 그들에게 관직과 봉토까지 주었기에, 화산이씨(花山李氏)와 정선이씨(旌善李氏)의 후손들이 오늘날까지 2천여 명 살고 있다.

조선시대 세종 때에도 오늘날 우리가 겪는 저출산·고령화 현상과 일자리 위기까지 겹쳤다. 세종은 출산장려를 위해 여승방(女僧房) 폐지, 미혼여성가문의 문장(門長) 문책, 혼례 및 조산비용은 가문에서 조달, 심지어 노비에게도 출산예정 달에 노동금지와 100일간 유급휴가를 주도록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아예 명기했다. 오늘날 출산장려정책은 비견이 되지 않을 만큼 당시 세종의 정책은 획기적이었다.

또한 세종은 일자리를 마련하고자 문신 김종서(金宗瑞, 1383~1453)로 하여금 함경도 일대 변방에 있는 4군6진(四郡六鎭)을 개척하고 일거리 없는 백성을 이주시켰다. 다른 한편으로 주변유랑민(邊民)을 회유해 안정된 일자리까지 마련해 주었다. 이후 숙종 때도 간도 개척사업을 추진하고 사민정책(徙民政策)을 통해 일자리 위기를 해결했다. 조선말기와 1960년대에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등 남미이민정책, 일본제국에서는 만주(북간도)간척을 위해 삼남지방의 백성을 옮겨 살게 한 사민정책(徙民政策)도 강행됐다. 1963년부터 1980년까지 광원과 간호사를 독일에 파견했고,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중동 건설노동자로 품팔이 가는 피눈물 나는 인력송출정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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