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옥이 만난 작가] 故 장석수, 있는 듯 없고 없는 듯 있는…형상화할 수 없는 감정의 질곡
[서영옥이 만난 작가] 故 장석수, 있는 듯 없고 없는 듯 있는…형상화할 수 없는 감정의 질곡
  • 서영옥
  • 승인 2019.02.18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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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후, 인상주의·자연주의 화법 유행에도
자유로운 표현력으로 지역 추상미술 기틀 마련
음푹 파인 볼, 열린 입, 초점 없는 눈을 가진 ‘광녀’
미쳐야 하는 예술세계 속 자신을 투여한 건 아닐까
장석수작품
장석수 작 1965년 패널에 유채.

 

<서영옥이 만난 작가> 故 장석수

장석수
 
△장석수(1921~1976)= 경북 영일군 장기면 출생. 장기초교·교토 동산중학교 졸업. 일본 태평양미술학교졸업. 1942년 조선미술전람회 입선 이후 1943년 일본 태평양미술학교 유화과 졸업. 1946년 대구여중, 대륜 중, 사대부고, 경산중, 신명여중고 교사 재직. 1949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신생’ 입선. 1960년 경북 문화상을 수상. 1963~69년 영남대 교수 재직. 1965년 영남대 예총 경북지부 미술협회장 역임. 개인전 총 6회.

인연은 시공을 초월한다. 묘한 울림으로 다가오는 고인의 작품과 마주할 때 드는 생각이다. 얼마 전 치바이스((齊白石, 1860~1957)의 초충도(草蟲圖)와 그 곁에서 전시중인 입체파(Cubism) 화가들의 작품들을 감상할 때였다. 예술가는 죽어서도 살아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작품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예술정신’을 느꼈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때론 작품 한 점이 고인의 전 생애를 통찰하게도 한다. 故 장석수(張石水, 1921~1976) 선생의 작품 <광녀>가 그랬다.1921년 경북 영일군에서 출생하여 55년의 생을 살다간 故 장석수는 대구에서 추상미술의 기반을 다지고 이끌어온 화가로 자리매김 한다. 1935년 장기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에 대구 교남학교(嶠南學校)를 자퇴(현 대륜중)한 뒤 일본으로 가 교토(京都) 동산중(東山中)을 졸업(1940년)한 이력은 선생의 유복했던 환경과 일찍이 일본에서 서구식 미술교육을 받은 작가라는 단서를 제공한다.

선생은 1946년 대구여중 미술교사로 부임한 이래 줄곧 중·고등학교를 거처 1963년 대구대학교 초대 응용미술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작고하기 전까지 영남대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한 교육자이기도 하다. 미술계는 장석수 선생이 故 극재 정점식 선생(계명대학교)과 더불어 대구에서 추상미술의 기틀을 마련하고 성장 발전시켰으며 후학양성에도 힘썼다는 공통점에 주목한다.

화가였던 장석수 선생은 글도 썼다. 독서량도 상당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작가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몇 번이고 책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직접 쓴 텍스트「黑暗을 등진 房안에서」가 그 단서이다. 이 글은 선생이 경계를 두지 않은 독서뿐 아니라 자율적인 예술관과 냉철한 비평정신을 숨기지 않는다. 다음부터 제시하는 예문들이 그 일부이다. “책상 위에 놓인 원고지가 시종 나를 붙들어 맬 것 같습니다.” (중략) “아무렇게나 산적(山積)된 책과 책이 피사의 사탑인양 무너질 듯 경사(傾斜)된 모양이란…”

이 글「黑暗을 등진 房안에서」는 장석수 선생이 일찍이 서양화법을 익힌 화가였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벌써 이십년은 되나 봐요. 나는 당시 그림을 배웠습니다. (중략) 풍경화를 그릴 때에는 처음 하늘을 푸르게 시작해서 원경, 중경, 근경의 차례로 마쳐야 합니다. 정물화는 기승전결(起承轉結)의 구도라야 만족할 수 있고 부연(不然)이면 불가피이니라 정할 적에도 이것은 기(起)에 좋으나 전(轉)에서 실패했다는 등 명암이 어떻고 명부(明部)와 암부(暗部)를 어찌하라는 등의 잡다(雜多)한 고마운 화법을 아 그림에 힘을 다했습니다. 편리하고 만족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생은 객관적인 화법 안에 자신의 예술을 가두지 않았다. 과학이 데이터를 통해 객관적인 법칙을 찾아내는 것에 집중한다면, 미학은 객관적이거나 일반화될 수 없는 미적가치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더욱이 6·25 전쟁직후(戰後)라는 혼란기는 다른 예술가들처럼 선생에게도 철학적인 사유의 토대를 다지고 표현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계기가 됐을 것으로 판단된다. 객관적인 잣대로 가늠할 수 없는 감정의 분출을 합리적인 화법(원근법, 투시도법, 음영법 등)이 감당하기에는 벅차지 않았을까. 1966년에는 아예 작품 제목을 <작품>으로 달기도 한다. 비 대상회화의 흔적이다. 선생은 현실을 미(美)로 접근하여 조형예술화한 화가이다. 이때 미는 진위가 아닌 쾌와 불쾌의 문제이다. 특히 쾌는 인간의 궁극적 목적이나 세계관과 관련이 있는 주관적인 것에 해당된다.

선생은 자신의 이러한 예술적 신념을 학생들에게도 내비쳤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아주 옛날이었나 봅니다. 그때 배운 금과옥조(金科玉條), 이런 말이 통용될 런지가 요즘은 그리 고맙질 않습니다. 더 솔직하게 말해볼게요. 지금 우리학교 미술반 아이들에게 금과옥조의 화법을 무조건 팔아먹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가 옛날인가 봅니다. 마치 봄바람이 꽃밭을 지나가듯 태탕(湯)한 태평세월이었나 봅니다.”

당시 화단에서는 인상주의나 자연주의식 표현법이 유행처럼 번졌지만 장석수 선생은 거기에 편승하지 않고 자유로운 예술표현을 추구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나는 지금 화법에 관해서 모조리 이야기할 방도가 없습니다마는 그림을 좀 더 자유스러운 것으로 봅니다. 화법은 있으되 그저 기교상 금기되는 몇 가지 이 외는 그리 문제시 안합니다. 이상 말한 것은 우리 연령에 있는 화가이면 공통되는 현실이라 할까, 가장 주요하면서도 일면 가장 잊기 쉬운 것입니다. 또 용이하게 이해되는 반면에 가장 고집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서양에서 근대화는 과학화와 맞물린다. 당시 과학에 대한 믿음은 사회 전 영역을 장악했고 다양한 학문들을 낳았다. 분화되어 나타난 것이 미학이다. 그러나 서양의 근대미학은 합리주의에 근거한 과학의 길을 따라갔다. 자연을 관찰하고 분석하여 객관적 원리를 찾아내는 과학주의는 이성의 힘으로 근대문명을 주도하는 한계를 보였으나 바움가르텐에 의해 인간의 감성도 학문의 반열에 올라서게 된다. 바움가르텐은 양식이나 형식만으로는 작가의 작품세계를 다 이해할 수 없는 이유를 그의 학문으로 증명한 셈이다.

감상자의 마음이 다른 것으로 꽉 차 있어도 그림이 들어올 자리가 없다. 선입견에 사로잡히거나 지식에만 의존해도 예술정신(또는 예술감정)과의 교감은 요원해진다. 비운 마음일수록 작품 속으로 빠져들기가 쉽고, 가끔은 작가의 예술정신과 단박에 마주치는 요행과도 맞닥뜨린다. 예술 하는 그 순간만큼은 치열한 독(獨)살이였을 작가의 예술세계를 탐독하기 전에 감상자가 하는 일종의 다짐 내지는 점검 같은 것이다. 고백하건대 43년 전(1976년)에 작고한 장석수 선생을 대면한 적은 없지만 작품으로 만날 수 있는 것은 이런 점검의 도움이 컸지 싶다.

장석수 선생은 격변의 시대를 치열하게 고민했고 내면의 소리에도 귀 기울였던 작가이다. 자유자재한 마음을 그림으로 표현했던 그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자세로 표현의 자유를 획득한 작가였다. 격변하던 시대가 토해낸 삶의 질곡에 감정이입하고 걸러내어 추상미술을 추구했던 작가다. 그는 감정과 감각의 직접적인 표현에 주목한 표현주의적인 미술을 취하기도 하였다. 1955년에 제작한 작품 <광녀>가 그 중 하나이다.
 

장석수 작 ‘광녀’

이미 1949년 제 1회 국전에 작품 <신생>으로 입선한 선생이 1955년에 제작한 <광녀>가 개성적인 작품의 시발점이라고 보긴 어렵다. 다만 <광녀>는 시공을 초월하여 나와 인연 맺어진 작품이라는 것에 의미를 둔다. 37×47cm의 작은 캔버스에서 존재를 강하게 각인시키던 <광녀>는 너른 전시장(문화예술회관 5전시실)을 집어삼킬 만큼 충격적인 표정으로 관객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움푹 파인 볼과 다물지 않은 입, 초점 없는 그녀의 눈빛을 주시하다가 작가의 심연으로 사정없이 빠져들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쩌면 <광녀>는 미쳐야만 다다를 수 있는 예술의 길에서 미쳐 돌아가는 듯한 세상에 스스로를 가두고 풀기를 반복한 작가 자신은 아니었을까. 잘 아시다시피 <광녀>는 ‘미친 여자’가 아니던가.

국어사전은 ‘미치다’를 두 가지 경우의 예를 들어놓았다. 하나는 ‘한정한 곳에 이르다’이고, 다른 하나는 ‘신경계통이 탈이 나서 언어 행동이 이상해지다. (또는 몹시 흥분해 정신이 보통 때와 다르게 날뛰다)’이다. 머리에 꽃을 달았지만 꽃의 아름다움을 무색하게 만드는 장석수의 <광녀>는 한정한 곳에 다다른 자가 아니라 신경계통에 탈이 나서 행동이 이상해진 여자다. 인척 하는 것과 다다른 것은 엄연히 구별된다. 예술이 삶의 해법을 내놓을 순 없지만 그렇다고 외면할 수도 없었던 때에 작가에겐 그림이 장신구가 아닌 절박한 현실이었음을 <광녀>가 확인시켜주는 것 같다.

장석수의 작품들은 생각의 곁가지를 버리고 근원적인 것으로부터 현실을 분리시키지 않은 감정의 분수령들이다. 산이 높으면 골짜기 또한 깊은 것처럼 故 장석수는 이성과 감성사이의 간극을 조형예술을 통해서 심화 내지 극대화시켰다. 그는 평생 뚜렷하거나 흐린 형상의 조형을 반복함으로써 있는 듯 없고 없는 듯 있는 마음을 조형했다. 작품 <광녀>도 그 중 하나이다.

서영옥ㆍ미술학 박사 shunna9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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