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줌인아웃]영화 '우행록', 당대 사회의 환부를 끄집어 올리다
[백정우의 줌인아웃]영화 '우행록', 당대 사회의 환부를 끄집어 올리다
  • 백정우
  • 승인 2019.03.21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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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행록
 
 

백정우의 줌 인 아웃, 영화 '우행록'

일가족 살해사건 발생 1년. 피해자는 타코우와 그의 아내 나츠하라와 딸이다. 잡지사 기자 다나카의 집요한 취재가 시작된다. 살해당한 부부에 관한 상반된 두 개의 진술. 타코우의 직장동료는 “왜 그렇게 좋은 놈이 죽임을 당했을까.”라며 안타까워하지만 나츠하라의 동창은 “나츠하라 상이라면 어디서 어떤 원한을 샀대도 이상하지 않다.”고 말한다.

‘우행록’은 1년 전 벌어진 살인사건을 씨줄로 하고 주인공 여동생의 영아방치를 날줄로 직조한다. 추적스릴러의 외피는 시간 흐름에 따라 다른 국면으로 향하는데 마지막 퍼즐이 채워지는 후반에 드러나는 건, 사건에 집착한 다나카의 본심이다. 그러니까 ‘누가 범인이냐가 아닌 왜 이 사건이 벌어졌느냐’에 집중한다는 것.

한국사회 가장 큰 문제는 빈부격차가 아니다. ‘빈부장벽’이다. 빈자에서 부자로 가는 장벽이 점점 높아진다는 것. 자본주의 경쟁사회에서 빈부격차는 불가피한 일이지만, 분발을 통해 뛰어넘을 제도와 기회가 보장되어야 함에도 선택지마저 축소되었다. 계급의 상향이동성이 실종되었다는 얘기다. 아무리 노력해도 넘을 수 없는 벽 앞에서 사람들은 희망을 잃는다. 계층이동의 불가능성으로 인해 싹트는 분노와 증오. 그러므로 감독이 통렬한 어조로 날린 한 방의 종착지는 일본사회의 계급화·보수화이다. 계급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지고 진학을 통해 고착되며 사회 진출과정에서 정점을 친다. 타코우와 신입사원들의 대화(출신학교를 따지고 좋은 상대와 결혼하는 성공방정식)는 보수화로 치닫는 당대 일본의 20대에 관한 근심어린 진술이다.

외부인이 쉽사리 넘볼 수 없는 견고한 벽은 집과 학교와 회사로 이어진 후 다시 가정의 문제로 환원된다. 극중 인물이 “일본은 양극화의 문제가 아니라 계급이 문제”라고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친부의 성적학대도 견딘 미츠코가 끝내 넘지 못한 건 계급이었다. 불우한 과거를 잊고자 전력으로 공부해 명문대 진학에 성공했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상류층 출신의 ‘내부생’과 평범한 가정의 ‘외부생’으로 갈린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땐 너무 늦었다. 문제는 상류 그룹에게만 있지 않다. 권력은 지배자 대신 피지배자가 통제할 때 더욱 잔혹해지는 법. 나츠하라는 내부생에 합류하려 안간힘 쓰는 과정에서 그들보다 더 비열하고 비인간적으로 전락한다.

봉준호의 ‘마더’에서 김혜자의 살인을 알아 챈 원빈은 말한다. “죄가 몇 바퀴 돌아서 내게 오는 거야.” 원죄의 굴레에서 벌어진 행위는 사적 속죄가 불가능하다. 모두가 연루되었고 모두가 공범이기 때문이다. 집단에서 비롯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김혜자가 침을 찔러 망각을 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부생에 끼고 싶어 친구를 도구로 삼았던 나츠하라도, 여성을 입신양명의 수단으로 이용했던 타코우도, 이들에게 처절하게 이용당한 미츠코와 그의 오빠 다나카도 원죄라는 회전목마에 탑승한 일부에 불과했다. 살인사건의 진상을 추적하는 스릴러가 범인의 공표와 처벌을 다루지 않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계층갈등과 빈부장벽으로 뒤덮인 당대 사회의 환부를 똑바로 보라는 외침. ‘우행록’이 어리석은 자들의 말과 행동으로 우리에게 남기는 피맺힌 증언이다.

 

백정우 영화평론가
백정우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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