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와트, 자연과 유적의 아름다운 공존
앙코르와트, 자연과 유적의 아름다운 공존
  • 김광재
  • 승인 2019.03.28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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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한 조각으로 둘러싸인
작은 사원 ‘반테이 스레이’
장신구 치장한 왕비 떠올라
다음날 둘러본 앙코르와트
거대한 규모와 장식 위엄 서려
 
프레아 칸
프레아 칸

 

어릴적 우표 속 동경하던 그곳…캄보디아 앙코르와트를 가다

우표수집이 아이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한 적이 있었다. 가봉공화국 봉고대통령 방한 기념우표도 있었고, 몇 대인지는 모르겠지만 대통령 취임 기념우표도 있었다. 그런 높은 사람들 얼굴 나온 우표가 시간이 지나면 값이 많이 오른다고 들었다. 그렇지만 우표첩을 펼쳤을 때 내 기분을 좋게 만드는 것은 예쁜 우표였다.

그중에 내가 가장 좋아했던 우표는 기묘한 건물 그림이 들어있는 우표였다. 그 우표 귀퉁이에 ‘앙코르와트’라고 적혀있었다. 정글북, 걸리버 여행기 비슷한 공상을 하면서, 언젠가 꼭 한번 가보리라 다짐을 했었다.

세월이 흘러 우리나라 사람들도 해외여행을 다닐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세월은 그 단단하던 동경마저 늘어난 고무줄처럼 만들어버렸다. 누군가 앙코르와트에 다녀온 얘기를 하면, “나도 어릴 적에 거기 가보고 싶어 했다”고 덤덤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그래도 어릴 적 기억 때문이었는지, 닷새 정도 여행 다녀올 여유가 생기자 선뜻 앙코르와트를 선택했다.

앙코르와트일출
앙코르와트 일출

김해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밤 11시가 넘어 캄보디아 씨엠립 공항에 내렸다. 예약한 호텔에서 픽업하러 온 ‘툭툭’ 기사가 팻말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로 부딪혀오는 아열대의 밤공기가 살짝 기분을 들뜨게 했다. 20분쯤 달려 호텔에 도착했다. 2층 건물에 객실이 20개가 안 되는 작은 호텔이다. 체크인하면서 내일 이용할 툭툭 예약을 부탁하고 객실로 올라갔다. 방은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이번에도 감탄은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의 촬영, ‘뽀샵’ 기술에 돌아간다.

앙코르 제국의 유적을 차분히 둘러보기에는 짧은 4박 6일의 일정, 이번 여행은 대충 둘러보고 적당히 빈둥거리기로 했다. 언제 다시 오겠느냐는 생각에 욕심을 부렸다가, 고생한 기억과 사진만 남는 여행이 될 것 같아서였다. 이렇게 미지근한 태도를 갖게 된 것은 TV, 책, 인터넷 등으로 사진과 영상을 너무 많이 본 탓도 있다.

도착 다음날, 규모는 작지만 조각이 가장 아름다운 사원이라는 반테이 스레이(Banteay Srei, 현지인 발음은 ‘반떼이 스라이’처럼 들렸다)로 갔다. 붉은 사암으로 만든 사원은 섬세한 조각으로 둘러싸여 마치 화려한 비단과 장신구로 성장(盛裝)을 한 왕비가 연상됐다. 반테이 스레이가 ‘여인의 성’, ‘아름다운 사람이 머무는 곳’이란 뜻이라 하니, 잘 어울리는 이름을 얻었다.

 

바이욘부조
바이욘 회랑 부조

출입문 위의 장식물 프론톤에는 힌두 신화를 모티브로 한 부조가 새겨져 있었다. 중앙사당 입구 옆벽에는 서양인들이 ‘동양의 모나리자’라 불렀다는 데바타(여신) 상이 우아한 모습으로 서 있다. 20대의 앙드레 말로가 이 데바타에 홀렸는지 물욕에 눈이 멀었는지, 여신상을 훔쳤다가 붙들려 감옥살이를 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가까이서 보고 싶었으나 중앙 성소는 들어갈 수 없도록 줄을 쳐놓았다.

반테이 스레이를 보고 나와서 오른쪽 길로 돌아 나오면 넓은 습지가 있다. 우포늪과 비슷한 느낌인데 물소 등에 왜가리들이 앉아 있다. 새들에게 물소 등은 움직이는 작은 섬 같겠다. 물소에게 새들은 가려운 곳 긁어주는 친구 같을까? 멀리서 첨벙이는 물소리가 들리면 흰 날개가 하늘을 한 바퀴 돌고 다시 등에 내려앉는다. 평화로워 보였다. 돌아오는 길에 들른 반테이 삼레(Banteay Samre)는 비스듬한 햇빛을 받아 신비로운 분위기였다. 찾아온 관광객도 거의 없는 고즈넉한 사원을 천천히 걷는 시간이 좋았다.

앙코르와트의 일출과 프놈 바켕의 일몰은 앙코르에 와서 꼭 봐야 할 장면으로 손꼽힌다. 서향으로 지어진 앙코르와트의 탑 위로 떠오르는 태양과 호수에 비친 앙코르와트의 실루엣이 환상적이라고 한다. 또 높이가 60여m밖에 안 되지만 프놈 바켕은 드넓은 평원 가운데 우뚝 솟은 산이어서(‘프놈’이 산이라는 뜻) 해넘이 풍경이 장엄하다고 한다. 그렇지만 프놈 바켕은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면 일찍 가야 하고, 사람들도 많이 몰린다고 해서 프레 룹(Pre Rup)으로 갔다. 왕족의 화장터 역할을 했다는 사원인데 이곳도 일몰 명소로 알려져 있다.

붉은빛을 띠는 사원에 올라 서쪽으로 넘어가는 해를 바라봤다. 별 감동은 없었다. 멋진 일몰은 여러 조건이 맞아 떨어져야 볼 수 있는 것이구나 했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보러 간 앙코르와트의 일출도 특별하진 않았다. 오히려 4륜바이크를 타고 나가 들판에서 만난 일몰이 좋았다. 하지만 그것도 언젠가 한적한 국도에서 백미러로 본 일몰 풍경이나 안심습지의 일출보다 나을 건 없었다. 앙코르의 일출과 일몰에 대해서는 내가 운이 나빴다고 할 수밖에 없다.

앙코르와트 일출을 본 뒤, 호텔에서 싸준 도시락으로 아침을 때우고 앙코르와트를 둘러봤다. 3층 중앙성소는 한달에 네 번 문을 닫는데 마침 그날이어서 보지 못했다. 입장 인원이 제한돼 있어 평소에도 한 시간 정도 줄 서서 기다려야 올라갈 수 있다고 한다. 중앙성소를 못 봐도 앙코르와트는 앙코르와트였다. 이전에 둘러본 유적들은 어떤 특별한 아름다움이 두드러졌지만, 앙코르와트는 우선 규모도 큰 데다 구조와 장식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한두 요소를 꼭 집어내기가 어렵다. 한 문명의 극성기에 세워진 대표작이 갖는 위엄이 이런 것인가 싶었다. 우리가 불국사와 석굴암에서 통일신라 예술의 정수를 느낄 때처럼 침묵이 자연스러웠다.

앙코르톰 중심의 바이욘 사원에서 만난 ‘크메르의 미소’라고 불리는 얼굴 조각을 가까이서 대하니 묘한 느낌이 들었다. 영상으로 보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의 차이를 확연히 느끼게 해준 경험이었다. 이 사원을 세운 위대한 왕 자야바르만 7세의 얼굴이라고도 하고 아발로키테스바라(관세음보살)의 얼굴이라고도 한다. 이 많은 얼굴들의 표정이 다 같은 것 같기도 하고 다른 것 같기도 하다. 미소 짓는 것 같기도 하고, 명상에 든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돌에 남은 이끼 자국과 카메라 각도에 따라서 슬퍼하거나 화난 것처럼 보이는 것도 있다. 뚜렷하게 잡히는 것이 없으므로 아마 이 얼굴들은 오래 기억에 남아 이따금씩 떠오를 것이다.
 

프레아 칸의 돌틈에서 자라고 있는 어린 나무
프레아 칸의 돌틈에서 자라고 있는 어린 나무

 


그러나 가장 오래 기억될 것은 돌 틈에 뿌리내려 겨우 대여섯 장 잎을 틔운 어린 나무일 것이다. 앙코르에서 처음 둘러본 사원 프레아 칸에서 보았는데, 며칠 뒤 나무에 점령당한 타 프롬을 보고는 그 의미를 깨달았다. 인구 70만이 넘었던 도시를 5백년만에 돌무더기로 만든 것이 바로 그 어린 나무였던 것이다. 앙코르를 지은 것은 사람이었으나, 무너뜨린 것은 태양과 비와 바람이 키운 나무와 풀이었다. 이제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와 돌을 다시 일으켜세우고 있다. 그러니 프레아 코의 그 어린 나무도 곧 뽑혀나갈 것이다. 나무는 오래전에 사람들이 옮겨놓은 돌 옆에서 제 할 일을 하며 긴 세월을 기다릴 것이다. 앙코르를 찾는 사람들은 그 기나긴 시간 속의 짧은 한 순간을 머물다 간다.

김광재기자 contek@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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