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옥이 만난 작가] 서예가 노상동, 正書에서 破書로, 이어 積書로…획에서 공간을 찾다
[서영옥이 만난 작가] 서예가 노상동, 正書에서 破書로, 이어 積書로…획에서 공간을 찾다
  • 서영옥
  • 승인 2019.04.08 21:1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一 긋기서 획 해체·쌓기로 도달…필묵 속 비가시적 공간 확보
추상서예가 인생 40년 “지필묵 중심, 文 없는 브랜드 론칭 꿈”
노상동 작
노상동 작.

 

 

<서영옥이 만난 작가> 서예가 노상동

전통서예가가 엄격한 미적 기준과 서법을 준수한다면 현대서예가는 개성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필묵의 조형성을 모색하는 부류라 할 수 있다. 서예의 본질을 현대적으로 해석해온 천수(千樹) 노상동의 선생(이하 노상동)은 한국 현대서예가 1세대이다. ‘추상서예’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한 그는 약 40년간 서예의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그의 서실에는 한일자를 비롯한 ‘공간’을 연구한 작품과 습작들이 40년이란 세월에 버금가는 높이를 유지하고 있다.

노상동의 추상서예를 관통하는 핵심 논제는 ‘공간’이다. ‘공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은 서예의 본질에 대한 질문에부터 시작됐다. 결국 서예와 회화 간의 미학적 토대를 갖추고 철학적 맥락을 찾아 ‘추상서예’라는 현대미술 속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것이다. 서예와 미술이 만난 셈이다. 그림과 글씨의 교차점으로부터 서예의 본질에 대한 탐문은 1980년대부터 시작된 작업이다. 노상동은 문자와 그림의 경계선 상에 있는 글자를 ‘한일자’로 상정하고 한일자의 일획에 주목한다. 한일자를 주제로 서예가 본래부터 지니고 있었던 추상성을 드러내기 위한 다양한 실험을 시도한 것이다.

노상동은 서예가로서는 드물게 영어영문학을 전공했다.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원에서 유교경전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한 경력 또한 현재의 그의 위치와는 다른 관심분야를 추측하게 한다. 동·서를 가로지르는 폭넓은 지식의 습득을 대변하기도 한다. 모두 노상동이 추구한 ‘추상서예’의 불쏘시개가 되는 단서이다. 1978년부터 1987년까지 운영한 서실과 1988년~1998년(11년)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행정기획 담당자로 활동한 경력도 간과할 수 없다. 현장에서 고서화 발굴 작업과 고전 공부를 한 기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 후 노상동은 1999년부터 2019년까지 20년간 ‘추상서예’ 실험에 푹 빠져서 35회라는 적지 않는 횟수의 개인전을 열었다. 곧 고희(古稀)를 앞둔 노상동은 지난 40년이 “맹목적이면서도 순수했던 연구의 시간이었다”고 회상한다.

노상동의 추상서예는 ‘한일자(一) 긋기’로부터 출발한다. 서예의 원형 탐색이 계기였다. 본질은 사라지고 방법만 난무하는 현재 서예계의 실정에 대한 우려이기도 하다.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한일자를 그었던 그의 예술노동은 획(劃)과의 씨름이자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한일자는 모든 획의 기본이다. 유일하게 상하가 고르게 내통하는 글자이기도 하다. 이때 상(上)과 하(下)는 하늘과 땅의 의미이다. 지위의 고하로 보아도 무방하다. 잘된 상명하달은 수평보다 낫지만 잘못 하달되면 아래쪽이 불편하다. 땅에 있는 모든 개체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하면 그것은 땅인 것이다. 수백만 개체에게 공평하면 그것은 이미 하늘의 섭리에 가깝다. 하늘은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데 하나이면 하늘이고 같은데 다르면 땅이다. 가치의 경중이 아니라 공존할 때 하늘과 땅은 각각의 가치를 발휘할 수 있다. 모두 한일자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이다. 天·地·人의 의미를 품고 있는 ‘한일자 긋기’에서 노상동의 예술관과 인생관이 읽혀진다.

한일자를 세워놓고 위에서 내려다보면 점(·)으로 보인다. 한 점은 파서의 끝이다. 외양은 다르지만 용량은 그대로다. 분신은 곧 부분이 아닌 전체용량 그대로임을 설명한다. 방향이 바뀌어도 본질을 오롯이 유지하는 글자가 바로 한일자인 것이다. 노상동의 한일자 긋기는 전통서예를 기반으로 하지만 고전적 서법을 드러내기 위한 노력과는 거리가 멀다. 눈여겨 볼 것은 ‘추상서예’와 해체작업이다. 의미와 조형의 합체인 문자를 해체하면 어떻게 될까. 글자의 복원에 의지가 더해진다면, 해체를 하는 동안에는 순수함이 되살아난다. 노상동이 복원보다 해체를 좋아하는 이유이다. 획의 합체는 의미를 품지만 해체하여 문자성이 희석되면 의미도 함께 사라진다. 파서를 밀고 가면 획만 남는데 문자가 지닌 의미를 빼려면 해체가 불가피하다. 서예의 ‘본질’을 이해한다면 노상동의 해체작업은 해체가 아닌 압축임을 알게 된다. 그의 해체작업 1단락은 본질을 유지한 압축적인 한일자 긋기로 마무리 된다.

한일자 긋기에 이어진 다음 작업은 파서(破書)의 적묵(積墨)단계이다. 물감을 뿌려 올린 잭슨 폴록이나 색을 층층이 올린 마크 로스코의 색면처럼 파서를 층층이 쌓다보면 비가시적인 수직적 공간이 생겨난다. 정서(正書)→파서(破書)→적서(積書)의 과정을 거치는 것은 고정된 땅을 해체하는 과정과도 상통한다. 적묵을 반복하다보면 수직적인 공간이 드러난다. 이렇게 탄생한 공간은 비가시적이기에 설명이 필요하다. 공간에 대한 해석과 관점은 다종다양하다. 고대의 원자론은 공간을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것으로 보았다. 물체와 공간을 동일선상에 둔 기하학과 물리학적 관점도 있다. 공간은 사물들이 인접한 경계와 사물을 받아들이는 용기 또는 장소의 총화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와, 상대운동과 연관된 절대공간을 주장한 뉴턴, 사물과 사물 간 상호관계에서 생성되는 공간(라이프니츠)과, 공간을 초월적 주관의 직관형식으로 조정한 칸트의 공간까지, 공간의 범위는 현실에서 범우주적으로 번져간다.

서예에서 공간은 두 가지 경우로 드러난다. 획 내 공간과 획 외 공간이 그것이다. 바로 노상동이 탐문하는 공간이다. 그는 수정과 편집을 거치지 않고 즉흥적인 발묵으로 공간을 드러낸다. 이때 공간은 중층적인 수직적 구조를 띤다. 서양화의 투시도법이 설명하는 수평적 공간과는 상충되는 공간이다. 새가 날기 전에는 하늘의 깊이를 모르듯이 빈 종이의 여백을 붓이 스쳐가며 생성한 공간에는 깊이가 발생된다. 작가는 수많은 털로 이루어진 붓의 털과 털 사이의 공간까지 계산한다. 종이의 망과 먹의 입자가 만나서 만드는 공간은 물론, 나뭇잎 자체 내의 비시각적인 세포공간처럼, 비백(먹이 사라지면서 생기는 흰 부분)과 심지어 갈필에서 생기는 미세한 공간까지 염두에 둔다. 서양화가 점·선·면의 바깥 공간을 노린다면 노상동은 점·선·면의 안쪽 공간을 찾아가는 것이다. 획 자체 안에서의 공간은 일종의 세포공간과 같은 공간이며 수평적 공간의 범위를 넘는다.

서법은 어떤 대상을 통해 내 몸이 반응하는 것이다. 노상동은 ‘강설착지(降雪着地)를 통해 그것을 설명한다. “모든 필법과 서법의 오묘한 이치를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강설착지와 같다”(노상동의 인터뷰 내용 중). 강설착지는 하늘이 땅과 만나는 순간이다. 2018년 2월 어느 날 출근길이었다. 정신까지 창백해질 만큼 큰 눈발이 날리던 날, 압도적인 설경에 포위당한 작가 앞으로 유난히 큰 눈의 결정 하나가 덩어리로 다가왔다. 사정없이 다가오는 집체만한 눈 덩이를 보고 위압감을 느끼는 순간에 깨달은 것이 해체작업의 시발점이 됐다. 노상동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공간을 붓으로 확보한 것이다. 지금까지 노상동이 기울인 적서(積書)의 노력은 비유비무(非有非無)의 경지이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빨라도 안 되고 너무 느려도 안 되는, 동양도 서양도 아닌 지점이다. 이도 저도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은 곧 모두 다 일수도 있다는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둔다. 노상동의 작업은 그것을 찾아가는 여정이 아닐까 한다.

애초부터 서예의 출발은 추상이었다. 향후 20년은 브랜드를 만들어가고 싶다는 포부를 밝힌 노상동이 찾아낸 브랜드는 일종의 도장과 같은 역할이다. 그의 모든 작품에 적용된 무늬이기도 하다. 그 시발점은 전통 서예이다. 지필묵을 매체로 하되 문(文)을 빼고 고상한 맛을 살린 지점, 작가는 그것을 통해 서예의 본질은 살리고 싶은 것이다. 작가는 무거운데 외부에서 보는 힘은 아주 작다. 그 힘은 결코 강압이 아니다. 노상동이 확장시킨 현대서예의 미적 범주가 관람자들에게 자연스럽게 비춰질 때 성공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서영옥ㆍ미술학박사 shunna95@naver.com

 

 

노상동 작
노상동.
△노상동=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원 유교경전학과 석사과정 수료하고 34회의 개인전과 10여회의 단체전을 가졌다.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과천), Written Art Foundation, Frankfurt, Germany, 휘닉스아일랜드(제주), (주)건화무역, 대구영남대학교 법학대학원, 경산하비람(서원, 충남 금산) 등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