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가 멀어진 세대에 질문 건네는 도시, 통영
향수가 멀어진 세대에 질문 건네는 도시, 통영
  • 김광재
  • 승인 2019.04.11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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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음식, 기후, 역사 등
너무 독특하고 특별한 곳이다”
윤이상 “어부들의 노랫소리가
배에서 배로 흘러 갑니다…
그 바다는 물고기가 한없을
정도로 풍부했습니다”
두 거장이 회고하는 고향 통영
낯설지만 친숙한 감정 일으켜
전후 2, 3세대 ‘도시 실향민’에
고향의 의미 어떻게 변해갈까
통영항
서피랑에서 내려다본 통영항.

동요 ‘고향의 봄’ ‘고향 땅’, 가곡 ‘가고파’ ‘향수’, 가요 ‘고향역’ ‘머나먼 고향’ 등등 고향을 소재로 한 많은 노래가 사랑을 받아왔다. 문학에서도 ‘귀향소설’이라는 하위 범주가 논의될 만큼 고향, 귀향을 다룬 작품들이 많았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인간에게 보편적인 것이라 할 수 있겠지만,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식민지배와 분단 그리고 산업화로 압축되는 20세기를 지나오면서 더욱 강화되고 널리 공감을 얻게 됐다.

분단으로 인한 실향민들은 이제 고향 땅을 다시 밟아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있다. 그 자녀들은 그런 부모들의 아픔에 공감할 수는 있을지언정, 부모와 같은 향수를 느낄 수는 없다. 일제 강점기와 6.25를 경험한 세대들의 향수와 같은 정서를 그다음 세대가 공감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시대가 다르고 경험이 다르기 때문이다.

가수 강산에의 ‘라구요’는 그런 2세들의 정서를 잘 보여준다. 부모 세대의 고통을 안쓰럽게 바라보지만, 그에게 향수의 대상은 ‘눈보라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가 아니라 그가 태어난 거제도나 어린 시절을 보낸 부산일 것이다. 전후 세대들의 향수는 대부분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한 것이다. 진학을 위해 고향을 떠난 후 정서적 유대가 끊어지거나, 개발로 인해 고향에 신도시가 들어서거나, 고향의 외관이나 생활 양식이 너무 크게 변해버려 ‘실향민’이 된 것이다. 그들 중에는 도시에서 태어나거나 자란 사람도 많다. 그들에게 고향, 애향심, 향수와 같은 말에 별 감흥이 없다. 그런데 우연히 통영으로 여행을 갔다가 지난 세대의 ‘고향’에 대해 한 걸음 더 다가갈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곳에 윤이상(1917~1995)과 박경리(1926~2008)가 있기 때문이다.

통영 하면 중학교 수학여행이 먼저 떠올랐다. 예전에 대구의 중학교 대부분은 수학여행을 통영(당시 지명은 충무)으로 갔었다. 충렬사, 제승당, 해저터널 등을 둘러보고 왔는데, 충무라는 도시는 그다지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당시 수학여행 온 학생들은 냄새나는 밥과 지저분한 여관방을 주어도 괜찮은 손쉬운 손님이었다. 그 뒤로도 지나가는 길에 두어 번 들르긴 했으나, 이곳저곳 둘러보지는 않았다.

어떤 이유로 통영행을 결정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2017년 늦가을에 들른 통영에서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 후 몇 번 더 통영을 방문하면서 통영이라는 도시의 분위기에도 익숙해졌다. 통영국제음악제 덕분에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바이올리니스트 미도리와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의 연주를 들을 수 있었다. 또 미륵산에서 내려다보는 한려수도의 풍광, 고승들이 한글 비석 늘어서 있는 정갈한 미래사, 정겨운 전혁림 미술관과 서점 ‘봄날의 책방’, 남망산 조각공원, 한산도의 충무공 유적 등 통영에는 가볼 만한 곳이 참 많았다. 무엇보다 윤이상 기념관과 박경리 기념관에서 알려준 그들의 고향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은 ‘도시 출신 실향민’에게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통영의 박경리 기념관은 하동의 토지문학관이나 원주의 토지문화관보다 방문객을 편안하게 맞아주는 것 같았다. 통영이라는 지역성과 작가의 작품세계를 관련성을 강조한 전시물들도 자연스러웠다. 박경리 생가가 있고, ‘김약국의 딸들’의 무대가 된 서피랑 마을을 걸어보면 그의 통영에 대한 기억을 어렴풋이 더듬어볼 수 있다. 맞은 편에서 사람이 오면 몸을 옆으로 돌려야만 하는 좁은 골목과 생가 담벼락에는 붙어있는 작은 동판은 대구 변두리의 어느 사라진 골목들을 떠올리게 했다.

김순철이 쓴 ‘통영 르네상스를 꿈꾸다’(2014 도서출판 경남)에는 실려 있는 인터뷰(2005년)에서 박경리는 고향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고향 통영은 어머니의 태와 같은 곳이다. 죽을 때는 고향으로 간다. 통영은 음식, 기후, 역사, 기질 등 너무 독특하고 특별한 곳이다. 자존심 하나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통영사람들이다. 통영처럼 예술가가 많이 배출된 곳이 없다. 모종을 부어 놓은 것처럼 많다.…… 해방 이후 서울에 살 때인데 ‘통영소반 사세요’라는 소반장수의 고함 소리를 듣고 얼마나 반갑고 자랑스러웠는지 모른다. 서울에서도 ‘통영소반’이라고 하면 잘 팔렸다. ‘통영갓’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드라마를 보면 벙거지 갓을 쓰는데 참 볼품없다. 통영갓을 쓰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옛날에는 통영사람들의 눈이 높았는데 지금은 아닌 것 같다. 시민들이 아름다움을 알아야 한다. 당장 군불 속에 넣을 장작도 아름답게 쌓는 것이 통영사람들이다.”

윤이상 기념관에 들어서니 첼로 선율이 나지막하게 울린다. 전시관에는 그가 사용하던 첼로, 바이올린 등 악기와 카메라, 녹음기 등 전자제품 그리고 독일에서 받은 훈장 등이 전시돼 있다. 그의 파란만장했던 삶과 작품세계를 설명해 놓은 패널을 찬찬히 읽어보면 한 시대를 풍미한 예술가의 치열한 정신을 짐작할 수 있다.

윤이상은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항일활동을 하다 두달간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통영문화협회에서 활동을 했으며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다, 본격적인 작곡 공부를 위해 유럽으로 유학을 떠난다. 유럽에서 작곡가로 입지를 굳혀가던 윤이상은 1967년 중앙정보부에 의해 서울로 납치된다. 이른바 동백림사건에 연루돼 기소돼, 1심에서 무기징역, 최종심에서 10년 형을 받고 수감됐다. 독일정부와 스트라빈스키, 카라얀, 리게티 등 예술가들이 구명활동을 벌였으며, 1969년 대통령특사로 풀려났다. 그는 죽을 때까지 고행을 그리워했으나 통영 땅을 밟을 수 없었고, 일본에 왔을 때 현해탄까지 와서 통영 바다 쪽을 바라보고 독일로 되돌아간 것이 가장 고향에 가까이 온 것이었다.

윤이상은 독일의 작가 루이제 린저와의 대담 ‘윤이상 상처입은 용’(2017 알에이치코리아)에서 통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런기억이 떠오릅니다. 바다 위에 고기잡이배가 떠 있고 밤에는 맑은 별이 떠 있는 하늘 아래서 어부들의 노랫소리가 배에서 배로 흘러갑니다. 아침에는 어시장이 있는 좁은 길에서 수많은 은빛 물고기들이 바구니 안에서 복작거리고 어떤 물고기는 은빛을 뿌리며 높이 튀어 놀라 바구니 밖으로 달아납니다.……통영 앞바다에서는 특별한 종류의 대구가 잡혔는데 정말로 맛있었습니다. 그 바다는 물고기가 한없을 정도로 풍부했습니다. 어쨌든 내가 어렸을 적에는 그랬어요.” 그가 말하는 대구는 백석의 시 ‘통영’에 “집집이 아이만 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이라는 구절에 나오는 그 생선이다. 이 대담에서 윤이상은 어린 시절 통영에서의 아름다운 추억들을 생생하게 들려준다.

윤이상과 박경리, 두 거장이 들려주는 고향의 이야기는 오늘날 새로운 ‘실향민’들에게 이상하게도 낯설지만 친숙한 이야기로 다가온다. 고향에 대해 갖는 특별한 정서는, 스스로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으나 본디 자신 안에 들어있는 어떤 것인가 아니면 어릴 적부터 부모 세대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내것처럼 받아들이며 성장했기 때문인가. 그리고 전후 2, 3세대의 고향에 대한 의식은 또 어떻게 다를까. 통영은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김광재기자 contek@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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