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단지 그것이면 충분했다 2
[문화칼럼] 단지 그것이면 충분했다 2
  • 승인 2019.04.17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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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국(수성아트피아 관장)
안도 다다오. 설명이 필요 없는, 자신만의 세계를 이룬 오늘날 가장 사랑받는 건축가 중 한 명이다. 강원도 원주의 ‘뮤지엄 산(Space.Art.Nature)’도 그가 설계한 작품이다. 많은 안도 다다오의 작품처럼 이곳도 건축물 자체가 오히려 뮤지엄의 기능을 앞서는 것 같다. 그의 건축물에서 볼 수 있는 특징, 공간의 획일성에 대한 저항. 즉 그 장소만의 고유성을 간직한 채 주변 환경을 최대한 살리는 것을 이곳에서도 잘 볼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것 같다.

물, 바람, 빛 그리고 소리와 자연이 함께하는 그의 건축물. 또 하나의 특징인 중정을 ‘뮤지엄 산’에서도 볼 수 있다. 얼핏 지나치면 그냥 자투리 공간처럼 보이는 중정 ‘삼각코트.’ 안도 다다오도 가장 마음에 든다고 했던 이 공간을 완성하고 건축가들은 공법상 어려움을 극복한 것에 막걸리 파티를 벌이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바닥에 고정되지 않은 채 울퉁불퉁하게 깔린 돌은 이곳이 명상의 공간임을 설명한다. 명상법 중 하나인 발에 닿는 감촉에 집중하며 천천히 걷노라면 세상의 온갖 소리와 상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삼각코트는 거기에 최적화된 장소다.

잘 알려진 대로 그는 고졸 학력의 프로복서 출신의 세계적 건축가다. 직관적인 생각을 키우고 몸소 건축을 느끼고자 여행과 독학을 통해 건축에 눈을 떴다. 우연히 책을 통해 ‘르 코르뷔지에’를 접하고 24세 때 그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운명은 그들의 만남을 허락지 않았다. 안도가 시베리아를 거쳐 핀란드에서 일정을 지체한 바람에 그를 만날 수가 없게 되었다. 뒤늦게 파리에 도착했지만 르 코르뷔지에는 그 직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권투선수 출신답게 안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용기를 잃지 않았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 동네에서 본 목공소, 철공소, 유리가게 그리고 오사카의 요도 강가에서 뛰어 놀던 기억이 훗날 그의 건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핸디캡을 극복하고자 많은 책을 읽고, 걸어 다니며 스케치 여행을 했다. 근대 대가들의 작품과 고전 작품을 직접 찾아다니며 온몸으로 받아들여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갔다. 그가 만나고 싶어 한 르 코르뷔지에가 여행을 통하여 건축에 눈을 뜬 것처럼…

안도 다다오가 여행을 통하여 일가를 이루었다면 소설가 박경리는 고통과 슬픔 그리고 외로움으로 그의 문학을 완성하였다. 아름다운 통영의 박경리 문학관과 달리 원주의 박경리 문학공원 주변 환경은 그리 문학스럽지(?) 못하다. 그러나 토지를 완성하고 말년을 보낸 그 집 대문 안으로 내딛는 발걸음은 아프다. 그런 절절한 작가의 아픔과 슬픔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 그곳에 있다. 문학은 ‘왜’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던 박경리는 늘 닫혀있는 대문 안에서 ‘왜’라는 질문을 멈추지 않고 자신의 문학을 완성시켜 나갔다. 89년에야 대문을 나서 첫 여행으로 중국을 다녀왔다고 한다.

박경리는 스스로 자신의 출생이 불합리 했다고 할 만큼 불우하고 외로운, 그리고 반항심 가득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불행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절대로 남성 앞에 무릎을 꿇지 않겠다던 그는 여고를 졸업하고 곧 결혼했다. 그러나 이십대 중반 6.25 전쟁 통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남편을 잃고 곧이어 세 살 난 아들마저 잃었다. 이후 인간으로서 감내하기 힘든 참척의 슬픔과 가난 속에서 창작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처럼 깊은 슬픔과 씻을 수 없는 한은 아름다운 문학으로 탄생하게 된다. “나는 슬프고 괴로웠기 때문에 문학을 했으며 훌륭한 작가가 되느니보다 차라리 인간으로서 행복 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박경리의 글 앞에서 옷깃을 여며야 하는 것이다.

처음 원주에 내려왔을 때 그곳은 밤이면 온갖 짐승 소리가 들리던 외진 곳 이었다 한다. 심란한 새벽이면 리어카를 끌고 원주 천으로 나가 돌을 주워와, 대문 안 집으로 오르는 길에 하나씩 박아 놓았다. 그 슬픔과 외로움의 돌을 디뎌야 우리는 그 집에 들어 갈 수 있다. 스스로 글 감옥이라 표현했던 그 집 에서 일체 사람도 만나지 않고, 글 쓰고 텃밭을 가꾸면서 그는 세상과 사람을 두루 꿰뚫어 보았다. 토지의 배경이 된 하동의 평사리 에는 가 본 적도 없단다. 눈을 감고 있어도 인간을 살피고 시대를 그렸던 것이다. “모진 세월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던 박경리 문학의 완성에는 단지 외로움과 슬픔 그것이면 충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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