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잔재’ 향나무, 이젠 완전히 뿌리뽑아야 할 때
‘일제잔재’ 향나무, 이젠 완전히 뿌리뽑아야 할 때
  • 이대영
  • 승인 2019.05.15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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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즈카 향나무는 왜색혼령”
뉴스 쏟아지는데도 식재 여전
대구시내 100개 국공립학교 중
56개소에 1천17그루 식재
전국 평균보다 2~3배 많아
경북은 현재 434개교서 식재
지역에 너무 깊이 뿌리내린 향나무
일본제국시대 학자들이 비웃을 일
신택리지-꽃구경
대구달성공원 꽃구경 스케치. 그림 이대영

 

이대영의 신 대구 택리지 - (20)아직도 우린 가이즈카 혼령에 물들어 있는가

조선천년을 지배하는 방안으로 일제는 차시환혼(借屍還魂)전략을 사용했다면 우리나라는 양동이 안의 꽃게 신세로 살아 왔다.

벗어나기보다는 서로 물고 늘어져서 한치 앞으로도 못 나갔기 때문이다. 한편에서는 가이즈카향나무의 왜색문화, 왜색혼령이라는 뉴스를 쏟아내고도 다른 한편에서는 계속적으로 식재해왔다.

2013년 8월 15일 안민석 의원은 광복 68주년을 맞아 일재잔재인 가이즈카향나무를 제거하자고 주장했으며, 국립서울현충원에만 가이즈카향나무가 846그루나 있고, 일본산 노무라 단풍(紅丹楓,Acer palmatum Shojo nomura), 요시노 사쿠라(Yoshinoyama Cherry Blossoms) 등이 1천527그루나 있다고 밝혔다.

지난 2014년 10월 23일 강은희 의원은 대구시내 100개 국공립학교 가운데 56개소가 가이즈카향나무를 심어 모두 1천 17그루나 되고, 경북도의 경우는 26.1%인 434개교에 일본산향나무를 식재한 것으로 파악했다. 전국 평균 13.4%가 가이즈카 향나무를 식재했으나 대구지역은 2~3배를 넘었다.

아무 곳에서나 잘 자라는 나무의 습성에 의해 할리우드 향나무(Hollywood juniper)라는 이름으로 무수하게 식재됐으며, 캘리포니아(California)는 물론이고 남서부지역에서 단시일에 가장 인기 있는 조경수가 됐다.

미국에서 유학한 많은 사람들은 가이즈카향나무를 미국산으로 인식하고 있다. 심지어 중국인마저도 카이펑(檜風,kiafeng)에서 개량된 사실을 잊고 있다. 1901년부터 일제식물학자들이 소개하고 도입했던 대만(臺灣)에서도 가장 인기 높은 조경수가 됐다. 유럽에는 이미 동인도회사를 통해서 본재(盆栽)로 제품화해서 수출했기에 주요한 식물원이나 역사적 사적지에도 보물급 식물로 예우를 받고 있다.

이런 오늘의 결과를 학수고대하고 피땀을 흘렸던 일본제국시대의 학자들은 식물국수주위가 뭔지 몰랐던 조선인들과 세계인들에게 회심의 미소를 보낸다. 가이즈카향나무에 담았던 일본의 혼은 조선에서는 황국신민(皇國臣民), 여타민족에게 오족협화(五族協和) 및 대동아공영이었다. 떠오르는 태양(rising sun)은 욱일기(旭日旗)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보는 가이즈카향나무에서도 타오르고 있다. 일본이 핵심이 되어 모두가 우산살이 되는 ‘팔굉일우(八紘一宇)’세상을 볼 수 있다. 바둑에 비유하면 천원(天元)에 돌을 먼저 놓은 것이다.

특히 식민지강점기 식물도감에 일제만행, 왜색잔재 등 청산대상이 될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근거가 없다보니 한국 사람들끼리 ‘거지들 자기네 자루 뜯기(乞食自分たちの袋に取り組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학문적 함정(academic trap, 모순, 억지춘양)에 빠지거나 일제식민지학자들의 혼령(滅朝還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꼴이 가장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지하에 있는 일제식물학자들이 박장대소(拍掌大笑)하면서 ‘유능한 독수리는 발톱을 감춘다’라는 말을 하며, 배꼽이 아프도록 껄껄거리고 있다.

‘동기의 벚꽃(同期の櫻)’이라는 태평양 전쟁당시의 군가를 보자. ‘너와 나는 연병장 뜰에 같이 핀 벚꽃, 피어있는 꽃이라면 지는 것은 각오, 멋지게 지자 나라를 위해 / 너와 나는 연병장 뜰에 같이 핀 벚꽃, 혈육의 정은 없지만 왠지 뜻이 맞아 헤어질 수 없구나... 저녁노을이 지는 남쪽하늘에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첫 번째 비행기... 너와 나 동기(同期)의 벚꽃 흩어지고 흩어진다고 해도, 벚꽃의 고향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 봄의 가지에 피어 만나자.’

2017년 상영된 ‘군함도(軍艦島)’에서 일본군이 해저탄광으로 들어가며 떼창하던 화면이 연상된다. 아직도 그들은 지하에서 기미가요(きみがよ)의 구절처럼 ‘작은 조약돌이 큰 바위가 되어 이끼가 낄 때까지(さざれ石のいわおとなりて苔のむすまで)’ 일제식물국수주의를 외치면서, 대구사람들의 머릿속에 벚꽃처럼 핑크빛 화혼(和魂)이 물들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진정한 달구벌의 얼과 꼴을 찾아서

나빤데기, 놏멘, 쪽(쪼아리) 등의 속된말이 있는 얼굴은 ‘얼’과 ‘꼴’의 합성어로 15세기 문헌에서 시작해 현재까지 쓰였다. 월인석보(月印釋譜 1459년, 월석2:53) 혹은 능엄경언해(楞嚴經諺解 1461년 능엄3:87)에서 ‘얼굴’이라는 말이 오늘날 의미로 나온다.

‘얼’이란 넋, 영혼, 정신 등의 의미를 가진 말이었다. ‘얼치다, 얼먹다, 얼나가다, 얼빼다’ 등도 과거에 사용되었다. ‘꼴’이란 겉으로 보이는 모양으로 외모, 용모 혹은 모습의 의미다. 얼을 담은 그릇, 얼의 외형, 정신의 발현 등의 의미로 얼·꼴 > 얼·골 > 얼·굴 등으로 변천을 했다.

얼·굴은 처음에는 몸(신체) > 상체 > 면상(面相)으로 의미축소현상을 겪었다. 아직도 얼과 꼴이 균형을 이루지 못함을 ‘얼빠졌다. 꼴사납다. 꼴값한다. 얼치기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 있어서도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문화(문명), 생활양상, 언행 등은 지역사회에 살아가는 우리들의 얼이 밖으로 나타난 꼴이다.

◇부러질지라도 굽히지 않는 올곧음(寧折不屈)

외지에서 달구벌(대구)을 볼 땐 ‘못 먹어도 고’ 혹은 ‘수구꼴통’라고 특징을 표현한다. 이런 말을 듣는 기저(基底)에는 대구만의 올곧음이 자리를 잡고 있다.

외형적으로는 “어떤 힘으로는 달구벌 사람들을 절대로 굴복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은 손가락으로 옆구리를 찌를때 가장 약하다”고 서울에 친구들이 늘 말한다. 이런 달구벌 지역정서가 지나치다보니 수구꼴통이라고 비췄던 것이다. 과도함이 정서로 비춰진 착시현상이다. 평가자는 수박 겉을 핥아보고 맛이 없다고 했다.

내륙분지인 달구벌은 해양 혹은 내륙의 문물을 비교적 늦게 받아들였으나, 한민족의 김치처럼 오랫동안 숙성시켜서 옹기장독 김치 맛을 재대로 내었던 곳이다.

달구벌의 꼴을 살펴보면 대구(大丘)란 사마천 사기(司馬遷 史記)에서 진시황(秦始皇)의 조상들이 살았던 대구(大丘)에서 따온 ‘황제출현의 본향(皇帝出現之本鄕)’이다. 팔공산(八公山)은 전한(前漢) 유안(劉安, BC179~122)의 회남자에 신선이 살았던 중국 안휘성의 명산이었다. 대명(大明) 혹은 명덕(明德)이란 동양의 제왕서인 ‘대학(大學)’에서 나오는 위정용어(爲政用語)다. 1397년 정도전의 삼봉집에선 경상도의 특성을 송죽대절(松竹大節)이라고 했다. 1969년 영화 팔도사나이에서 이대엽은 대구사나이로 열연하며 성급하게 ‘욱~’하는 성질머리를 보이면서도 시원시원한 일처리와 뒤끝이 없는 모습을 보였다.

BC 59년 ‘햇살처럼 공명정대함으로 세상을 다스림(光明理世)’이란 신라건국이념은 이곳 달구벌 조시(朝市)에서 아침햇살을 보고 계시를 받았다. 이곳 팔공산 장군봉 등에서 심신수련을 했던 김유신과 김춘추는 화랑들로 통일신라의 동량이 되었다.

1601년 경상감영이 이곳 대구로 이전해 옴으로써 감영문화와 영남유림의 본거지로 터전을 잡았다. 임진왜란, 한말의병의 출현, 6·25 전쟁의 최후보루, 호국보훈성지로 뿌리내렸다. 이런 외형(꼴)을 부화시킨 얼(정신 혹은 혼)에는 ‘위험을 보고 목숨까지 내놓는다(見危授命)’ 혹은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다(寧切不屈)’는 정신이 꽈리를 틀고 있다. 1864년 3월 10일 아미산 관덕정에서 수운 선생이 참형당하고 효시됨으로 동학(東學)이 이곳에서 발화했다. 또한 1907년 2월 대구 광문사(光文社)에서 시작했던 국채보상운동으로, 최근엔 1960년 2월28일 학생들의 2.28운동이란 꽃으로 피어났다.

‘우리가 남이가’ 하는 고집불통, ‘묻지도 따지지도 마’ 현상 혹은 배타보수성을 보이는 건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不事二君, 不更二夫)’는 윤리에서, 그리고 ‘못 먹어도 고’하는 성깔도 ‘기와로 보전하기보다 옥으로 부셔지겠다(寧可玉碎, 何能瓦全)’는 선비덕행에 기인하고 있다. 이 모두가 달구벌의 올곧음(正直)이었는데, 시대적 적응이 늦다는 점과 과도함에서 보수꼴통으로 보였던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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