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벌과 철학자', 꿀벌소리 붕붕거리는 재미난 서양사상사
'꿀벌과 철학자', 꿀벌소리 붕붕거리는 재미난 서양사상사
  • 김광재
  • 승인 2019.06.13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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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 좋아하는 철학교수 동생
철학 좋아하는 양봉가 형 공저
꿀벌 교미 관찰되지 않은 중세엔
성모 마리아 처녀잉태 근거로 활용
‘꿀벌 마야의 모험’ 원작 독일소설
나치 민족주의 전주곡으로도 해석
프랑수아 타부아요·피에르앙리 타부아요 지음
프랑수아 타부아요·피에르앙리 타부아요 지음

 

스페인 발렌시아 지방의 아라냐(거미) 동굴에는 바구니를 들고 꿀을 따는 사람을 그린 벽화가 있다. 높은 곳에 있는 벌집으로 올라가 구멍 속 벌집에 손을 넣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약 8천 년 전 중석기시대의 유적으로 추정된다. 이 곳 말고도 벌꿀을 채취하는 선사시대 바위그림이 여러 곳에서 발견됐다.

지난 2015년 ‘네이처’에 실린 한 연구는 광범한 지역의 선사시대 유적지에서 발굴된 질그릇에서 밀랍 성분이 발견되는 것을 근거로, 농경을 시작한 신석기인들이 벌써 양봉을 시작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인간과 꿀벌의 관계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는 중석기 시대까지 올라가지만, 영양학적 관점에서는 인류 진화 단계로까지 소급되기도 한다. 인류의 뇌 용적이 커지는 과정에 벌꿀이라는 고에너지 식품이 기여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뇌는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는 조직이어서 고기, 감자 같은 덩이줄기와 더불어 벌꿀도 뇌의 에너지 공급원으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사람들은 까마득한 시대부터 꿀벌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온 인류는 높은 지능과 생산력을 바탕으로 역사시대를 열어젖혔다.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 ‘삶과 죽음은 무엇인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등 근본적인 질문에 집착하게 됐다. 그러자 꿀벌은 그 해답 찾기에 골몰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으로 날아 들어와 달콤하고 끈적한 생각들을 남기기 시작했다.
 

스페인 발렌시아 알라냐동굴의 꿀을 채취하는 사람 바위그림
스페인 발렌시아 알라냐동굴의 꿀을 채취하는 사람 바위그림

그리스 신화에서 현대 민주주의까지 ‘벌꿀철학’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정리한 책이 ‘꿀벌과 철학자’(미래의 창 2018)이다. 꿀벌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살펴본 서양사상사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철학을 좋아하는 전문 양봉가인 형 프랑수아 타부아요와 꿀을 좋아하는 파리 소르본대 철학교수인 동생 피에르앙리 타부아요 두 사람이 함께 썼다.

인류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꿀벌은 철학 분야에서도 다양하게 활용됐다. ‘꿀벌과 철학자’ 뒤표지에서는 “올림포스 신들의 전령이자, 예수를 찬양하는 수도사이며, 나폴레옹 황제의 충실한 신하이자, 민주주의의 상징이었던 기상천외한 동물”이라고 꿀벌을 소개하고 있다.
인류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꿀벌은 철학 분야에서도 다양하게 활용됐다. ‘꿀벌과 철학자’ 뒤표지에서는 “올림포스 신들의 전령이자, 예수를 찬양하는 수도사이며, 나폴레옹 황제의 충실한 신하이자, 민주주의의 상징이었던 기상천외한 동물”이라고 꿀벌을 소개하고 있다.

 

책은 벌집의 6각형처럼 6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다.

1장 ‘꿀벌, 올림포스를 날아다니다’는 고대 그리스의 꿀벌에 관한 신화인 아리스타이오스 신화를 살펴본다. 이어 ‘꿀벌, 철학자의 우주 망원경’에서는 헬레니즘 시대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의 꿀벌, 로마 최고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걸작 농경시 ‘게오르기카’ 제4권의 주제가 된 꿀벌, 3세기 신플라톤주의 우주론에서의 꿀벌 등을 설명한다.

3장 ‘꿀벌, 신에게서 내쳐지다’는 중세 유럽에서 부침을 겪은 꿀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구약에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꿀을 섞은 신의 과자로 표현되는 ‘만나’ 등에서 꿀이 언급되지만, 신약에서는 자취를 감춘다.

“신약성서에서 중재자 역할을 맡는 건 예수가 거의 독보적이므로, 이 같은 관점에서 보면 꿀벌이 하늘과 땅 사이를 이어주는 존재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 감히 꿀 따위가 하늘에서 내려와 인간에게 영감을 안겨주고 신의 계시를 불어넣어주는 역할을 맡는 다는 건 말도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기독교 교부들에 의해 꿀벌의 복권이 이뤄진다. 꿀벌은 기독교인들에게 세 가지 선물을 주었다. 첫째는 우상숭배의 성격이 전혀 없는 제물인 밀랍양초이며, 두 번째는 성모 마리아의 처녀잉태를 증명하는 살아 있는 존재였다. 그 당시까지도 벌들의 교미는 한 번도 인간의 눈에 목격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예수의 탄생을 지적하는 사람들에게 교부들은 한 목소리로 “그렇다면 꿀벌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라며 반박했다. 셋째, 꿀벌의 생태는 복종, 연대, 순결, 헌신, 정절, 엄격 등 설교 주제의 보고가 됐고 벌집은 수도원의 ‘롤모델’이 됐다.

이어 4장 ‘꿀벌, 권력의 대가’에서는 정치사상사 속에서의 꿀벌에 대해 소개한다. 정치와 관련해서 꿀벌은 거의 만능이었다. 과거에는 군주정, 귀족정, 공화정의 상징으로 두루 쓰이던 꿀벌은 현대에 와서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자유주의 사상의 치열한 논쟁에서도 모습을 나타냈다. 모범적인 사례로 혹은 반대의 사례로 또 우화적으로 또는 분석적으로 꿀벌은 리베로처럼 계속 소환됐다.

5장 ‘꿀벌, 마법이 풀리다’는 신화적 상징적 세계에서 현실로 내려온 꿀벌이 시인들의 펜 끝에서, 그리고 학자들의 현미경 안에서 어떻게 인문주의의 상징으로 거듭나는지를 짚어준다. 마지막 장 ‘꿀벌은 또다시 우리를 구원해줄까’는 오늘날 자본주의 시스템이 환경 보전과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가, 그리고 오늘날 민주주의 정치시스템에서 최적의 의사 결정을 어떻게 공동으로 내릴 수 있는가, 라는 두 가지 물음에 대해 꿀벌이 어떤 해법을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대해 살펴본다. 이에 대한 저자들의 결론은 냉정하게도 “벌집 안에서 민주주의를 되살릴 가치를 발견한다거나 자본주의의 쇄신을 위한 기적의 해법을 바라지는 말자”이다.

각 장의 마지막에는 ‘밀원채집’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철학 구절이나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곁들이고 있다. 그중 14번째 항목은 일본 만화로 각색돼 전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꿀벌 마야의 모험’의 원작자 발데마어 본젤스가 반유대주의 성향의 기회주의자이며 한 자리 차지하기 위해 나치에 끈덕지게 달라붙었다는 독일 언론의 폭로를 전한다. 그리고 전체주의적인 공동체에 복종하기를 거부한 개인주의자의 이야기로 알고 있었던 이 소설의 결말이 사실은 나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전주곡으로 볼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전한다.

이 책은 담고 있는 내용도 풍부하고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세련되고 문학적인 표현을 읽는 재미 또한 독자들을 사로잡을 만하다.

예컨대 저자들이 붙인 한국어판 서문은 2008년에 발표된 꿀벌에 관한 논문을 한 편 소개하면서 번역에 대한 생각과 감사의 뜻을 전한다. 아시아산 꿀벌(토종벌)과 유럽산 꿀벌(양봉꿀벌)을 하나의 벌집에 모아놓자 기호화 방식이 서로 다름에도 상호 소통이 가능했다는 실험결과를 소개한 뒤, “‘아시아와 유럽, 두 지역을 대표하는 토종 꿀벌 품종조차도 600만 년 이상의 차이를 뛰어넘어 서로 간에 소통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데, 각각 수천 년 역사를 지니니 동서양 문명이 어찌 서로 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는 가르침을 전해주는 것이다”라고 썼다.

저자들은 또 ‘인류 문명의 무한한 지적 원천’이라는 제목의 에필로그에서 “진득거리는 꿀은 사람들을 하나로 모아주고 지식이나 질서, 사상, 취향 등을 서로 돈독하게 이어준다”면서 “꿀벌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듯이 미래에도 영원히 인간의 사유에 광장한 자극제가 될 것이다”라는 말로 이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김광재기자 contek@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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