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김수환 추기경…그의 숨결 고스란히
그리운 김수환 추기경…그의 숨결 고스란히
  • 김광재
  • 승인 2019.06.20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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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주기 맞아 군위 ‘사랑과 나눔 공원’을 가다
지난해 3월에 개장한 공원
아직도 ‘새것’ 분위기 물씬
기념관에 전시된 각종자료
삶의 흔적 그대로 느껴져
언덕 아래 조성된 그의 생가
우물·옹기가마까지 복원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십시오”
어록으로 꾸며진 추모공원도
입구조형물
공원 입구 조형물. “서로 밥이 되어 주십시오”라고 적혀 있다.

“서로 밥이 되어 주십시오.”

경북 군위군 군위읍 ‘김수환 추기경 사랑과 나눔 공원’ 주차장 입구 조형물, 부드럽게 미소 짓는 추기경의 얼굴 아래에 이렇게 씌어 있다. 나를 늘 밥이라 여겼던 당구장 친구들이 떠올라 웃음이 난다. ‘그들도 어딘가에서 엉거주춤한 나이로 살아가고 있겠지. 누군가의 밥이 되는 건 아닐까 하고 신경을 곤두세우며 살아왔을 테지. 그래 봤자 별수 없었겠지만. 하긴 산다는 게 남의 밥이 되는 것이기도 하네. 오늘 내가 밥이면 내일은 네가 밥이 되는 식으로. 그렇다면야 뻗댈 것 없이 흔쾌히 밥이 되어 주어도 좋았을 것을…….’ 추기경 말씀을 이렇게 제멋대로 읽으며 마음이 홀가분해진다.

주차장으로 들어가서 보니 그 뒷면에도 추기경의 미소짓는 얼굴이 있고, 아래에는 김 추기경의 생애가 6개의 패널에 정리돼 있다. 그리고 이런 구절이 적혀있다. “그동안 많이 사랑받아서 감사합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용서하십시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기념관으로 올라가는 길에 안내판을 보니, 공원에는 기념관, 경당, 생가, 십자가의 길, 평화의 숲, 추모정원, 중앙광장, 잔디광장 등이 조성돼 있다. 지난해 3월 개장한 공원은 아직 ‘새것’ 분위기다. 올해가 벌써 10주기다. 세월은 참 빨리 흐른다. 그러니 공원에 서 있는 둥치 가는 나무들도 곧 근사한 그늘을 드리울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은 한 종교의 지도자였으나, 그의 너른 품은 교회 밖 사람들에게도 피난처였다. 그는 불의에 맞서고 약자들을 보살피며 울타리를 넘어 화합을 실천한 우리 사회의 스승이었다.

 

김수환추기경기념관내부
김수환 추기경 기념관 내부.

김수환은 1922년 대구 남산동에서 옹기장수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김보현은 1868 무진박해 때 순교했다. 유복자로 태어난 아버지 김영석은 옹기를 팔며 이곳저곳 떠돌면서도 독실한 믿음을 지켰다. 외가도 신앙심이 매우 깊은 집안이었다. 외할아버지는 박해 속에서도 대구 천주교의 밑거름이 된 인물이었다. 혼자된 어머니는 어린 수환에게 버릇처럼 신부가 되라는 말을 했다. 어머니의 염원이 부담스럽기도 했고 잠시 방황도 했으나, 그는 1951년 서른 나이에 대구 계산동 주교좌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김수환 신부는 1956년 독일 유학길에 올라 1963년까지 뮌스터대학원에서 그리스도 사회학을 전공했다.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교회의 현실참여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됐으며, 이는 한국으로 돌아와 민주주의의 파수꾼으로서 큰 역할을 하는 밑거름이 됐다.

김수환 추기경은 1971년 성탄 미사에서 장기집권을 획책하는 박정희 정권의 공포정치를 준열히 비판하는 강론을 했고, 1980년 5월에는 천주교 주교회의 명의로 비상계엄 해제 촉구 담화문 발표했다.

 

십자가의길-제14처의청동조각
‘십자가의 길’ 제14처의 청동조각.

1987년 명동성당에서 열린 ‘박종철군 추모와 고문 근절을 위한 인권회복 기구 미사’ 강론에서 “이 정권의 뿌리에 양심과 도덕이 없다, 하늘이 두렵지도 않느냐”고 전두환 독재정권을 향해 일갈했으며, 6월 항쟁 때 시위대를 연행하기 위해 경찰이 명동성당에 난입하려 하자 “제일 먼저 나를 밟고 넘어가야 한다”며 단호히 막아섰다.

김수환 추기경의 문장에는 그가 주교 수품 때 선택한 사목표어 ‘PRO BOVIS ET PRO MULTIS(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가 새겨져 있다. 최후의 만찬에서 한 예수의 말에서 유래된 이 구절에는 세상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내놓는다는 뜻이 담겨있다.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노동자들, 빈민들, 농민들, 북녘 동포들을 위해 앞장서고, 마지막 길에서 각막을 기증한 것까지 모두가 그 말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수환추기경기념관유물
김수환 추기경의 유물.

기념관은 풍부한 사진자료와 영상자료, 그리고 안경, 만년필, 묵주, 친필원고 등 유품을 통해 김 추기경의 삶을 고스란히 되살려 놓고 있다. 돌아가신 스승의 행적을 톺아보는 마음으로 둘러볼 만하다. 생전에 김수환 추기경은 심산 김창숙 선생의 묘소를 찾아 절을 하고 술을 올린 적이 있었다. 의아해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선생은 스승과 같은 분으로 살아계셨다면 마땅히 찾아뵙고 인사드릴 어른인데, 돌아가신 분께 하느님의 은총이 가득하길 바라는 뜻에서 큰절을 올리게 됐다”고 말했다.

기념관을 나와 2층으로 올라가니 자그마한 경당(經堂, 가톨릭에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 봉헌된 집)이 있다. 오후 3시에는 여기서 미사가 열린다고 한다. 잔디광장 앞에 청동으로 제작한 성모마리아 상이 서 있고, 광장 뒤편 언덕에는 ‘십자가의 길’이 조성돼 있다. ‘십자가의 길’은 예수의 수난과 죽음의 과정에서 일어난 14개 사건을 따라가며 묵상하는 기도다. 열네 곳마다 각 사건을 표현한 청동상이 있는데, 마지막 제14처 ‘무덤에 묻히심’에 있는 갈라진 얼굴상이 인상적이다.

언덕 아래로 내려가면 김수환 추기경의 초가삼간 생가가 나온다. 집 앞에는 우물과 옹기가마도 복원해 놓았다. 생가를 둘러보고 다시 기념관 쪽으로 올라가는 길옆에는 김 추기경의 모습과 어록으로 추모정원을 꾸며 놓았다.

 

김수환추기경생가
김수환 추기경 생가.

주차장으로 가는 도중에 들른 화장실에는 이런 글이 붙어있다. “언젠가 경주 석굴암에 가서 넋을 잃고 불상을 바라본 적이 있습니다. 한 시간 이상 그렇게 서 있었을 것입니다. 무엇인가에 깊이 빠져들어 가는 것 같았습니다. 바티칸에 가면 세계적 미술품인 성상들이 많지만, 저는 5분 이상 한 작품을 응시한 적이 없습니다. 제 몸에도 불교의 피가 흐르는 것 같습니다. 상대방 종교의 고유 가치를 내 종교의 것과 마찬가지로 존중해야 합니다. 그래야 종교인들이 힘을 모아 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사랑과 화합의 모범이 될 수 있습니다.”

길 건너편에 ‘지보사 3㎞’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김광재기자 contek@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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