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 운동, 글로벌 문화·관광자원으로 활용해야
2·28 운동, 글로벌 문화·관광자원으로 활용해야
  • 이대영
  • 승인 2019.06.26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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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주도 반정부 시위
“학원에 미치는 정치세력 배제하자”
경북고 2학년 이대우 결의문 낭독
800여명 행진…일부는 연행되기도
5·18 광주민주화운동 도화선 된 셈
◇市에 주어진 과제
오페라·영화·문학 등 예술로 승화
5·18기념 문화센터와 연대 과제 발굴
세계적인 민주화 도시로 발돋움 노력
신택리지-228
대구 두류공원에 있는 2.28 민주의거 기념탑.
그림 이대영

 

이대영의 신 대구 택리지 (25) 민주화 불씨 지피다

1960년 2월 28일까지는 대구지역에 아무런 큰 변동사항이 없었다. 개미새끼 한 마리도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12시 55분 정각, 경북고등학교 교정운동장에 운집한 800여명의 학생들 사이로 2학년 학생위원회 부의원장 이대우(李大雨, 1942.2.2.~2009.9.13.) 학생이 조회단상(朝會壇上)에 뛰어올라가 결의문을 낭독했다.

횃불을 들어라! 동방의 별들아, 학원의 자유를 달라. 학원을 정치도구로 이용하지 말라.

학원 내 미치는 정치세력을 배제하라 등의 요구사항을 외쳤다. 결의문 낭독이 끝나고 800여명의 학생들이 일사불란하게 교정 밖으로 나와 반월당과 중앙통로(中央通路)을 거쳐 오후 1시 36분경 중구 포정동(오늘날 경상감영공원)에 있는 경북도청 앞까지 시위를 했다. 오후 2시 30분경엔 대구고교 학생들도 시위에 참여했으며, 경북여고생도 일부가 참여해 시민의 통행이 빈번한 중앙통의 매일신문사, 경북도청(1966년 산격동으로 이전), 대구시청, 자유당경북도당사, 경북도지사 관사 등을 돌면서 자유당 정권의 불의를 규탄했다. 이런 시위행렬은 오후 3시경까지 지속되었다.

시민들은 박수를 보내면서 격려를 했으며, 심지어 학생들이 경찰봉에 맞는 것을 보고 말리기도 했다. 끝내 220여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되자 다음날엔 불참했던 경북여고, 대구여고, 대구상고 등의 일부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했다.

학생들은 연행학생의 석방 등 요구사항을 경찰에 전달했다. 영화 ‘1987’에서 “똑똑히 새기라우. 내래 빨갱이 잡는 거 방해하는 간나들은, 무조건 빨갱이로 간주하갔어!!”라는 대사처럼 이강학(李康學, 1924~2006) 치안국장은 사전종북몰이를 했으며, 3월 2일 “학생들이 북한에 이용당했다”고 주장을 하면서 학생을 뒤에서 조종한 불온세력(不穩勢力)을 색출하겠다는 뜻으로 관련학생과 담당교사들을 모질게 추궁했다.

나중에 밝혀진 내용이지만 1960년 2월 27일 오후에 이대우 학생 집에서 경북고, 대구고, 경북사대부고 학생 8명이 모여서 i) 일요일 학생들을 등교시키는 부당함에 항의할 것과 ii) 항의시위에 낭독할 결의문으로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해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를 작성했다. 경찰은 i) 시민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감안하고, ii) 불안한 시국을 고민해서, iii)한국정치의 하와이(Hawaii in Korean Politics)혹은 야당도시 대구(Opposition City Daegu)라는 특유한 대구시민의 감정적 뇌관을 건드려 제2의 ‘10월 1일 대구사건’을 재발시키지 않고자, iv) 주동자만 처벌하고 나머지는 석방조치했다.

◇ 민주화운동으로 광야를 태운 들불

2.28기념 중앙공원의 북쪽에 설치된 지역출신 시인 김윤식(金潤植, 1927년생)의 ‘아직도 체념할 수 없는 까닭은’은 2.28민주화운동 당시의 시대상황을 생생하게 비유해 ‘i) 머리 위에서 먹장 같은 구름이 해를 가리고, ii) 빛 좋은 개살구가 익어가는 이 땅의 민주주의에, iii) 아직은 체념할 수 없는 까닭은 저리 우리들의 태양이 이글거리기 때문’이라고 적나라하게 밝혔다. 마치 세워놓은 서슬 퍼런 칼날과 같은 독재에 움츠렸던 대구의 지성, 지역 언론, 선인들의 혼령까지도 잠을 깨웠던 학생들의 외침이었고, 우리가 사는 이곳의 얼과 꼴까지 모두를 뒤흔들었다.

2.28운동의 그날, 대구학생들의 외침은 대구지방언론과 중앙언론을 타고 전국적으로 메아리쳤다. 3월 5일에 서울운동장에 있었던 장면 후보의 유세장에는 1천여 명의 학생들이 운집했고, 3월 8일 대전고(大田高) 학생 1천여 명이 장면 후보자가 유세하는 공설운동장에서 시위를 하다가 무장경찰과 난투극(亂鬪劇)을 벌여서 50여명이 연행, 3월 10일에는 대전상업고등학생의 시위, 수원농업고등학생, 충주고교생 데모가 전국에 동시다발적으로 확산되었다. 3월 12일에는 부산해동고교의 시위, 3월 13일에 서울시청 시위 등으로 민주화학생운동이 광야를 태우는 들불처럼 번졌다.

역사적으로 더듬어 본다면, 2.28민주화운동이 도화선(導火線)이 되어 3.15부정선거에 저항, 4.19의거를 촉발했으며, 뜻하지 않았던 5.16정변까지를 초래했지만 ‘완전히 꺼지지 않는 불씨’로 남아 있다가 1981년 5월 18일 5.18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다. 달구벌의 얼과 혼에 따라 ‘불의를 보고 목숨까지(見危授命)’를 던지는 올곧음의 발로(發露)였다. 현재 우리는 2.28기념사업으로 각종 자료수집, 조사 및 연구 활동, 회보발간, 출판, 문화행사 혹은 장학사업을 하고 있다. 2018년 1월30일 국무회의에서 2.28민주운동을 국가기념일로 결정하고, 2월 6일 관보에 게재했다.

이제는 1인당 GNP 3만 달러를 상회한 선진국의 시민이라는 점을 자각하고, 2.28민주운동이 우리에게 해결과제로 던진 것은 i) 대구시민으로 2.28민주운동의 이념을 계승하고 실천해 지역사회의 공익발전에 기여함은 물론이고, ii) 대한민국의 민주화와 나아가서 지구촌의 민주화에도 대구시민으로서가 아닌 지구촌인류의 평화와 민주화를 위해 해야 할 과제를 찾아야 한다. iii) 뿐만 아니라 속칭 ‘죽은 시체를 빌려서 영혼을 불러 넣는다(借屍還魂)’프로젝트도 추진해야 한다. 2.28민주운동을 단순한 운동정신에만 한정하지 말고 문화예술로 승화시키는 작업도 해야 한다.

오페라, 영화, 문학작품, 가요 등의 예술문화로 스토리텔링(storytelling)하여 세계인들의 삶과 가슴으로 파고들어 가야 한다. iv) 세계적인 민주화 대구 메카(Daegu Mecca of Democratization)로 거듭나는 방안도 강구해야 한다. 세계적인 문화관광자원으로도 활용이 가능하다. 5.18기념 문화센터와도 연대 추진할 과제를 발굴하고, 남아공의 만델라넬슨(Mandela Nelson, 1918~2013)의 민주화운동과도 공동연구 혹은 학회 등을 개최하기 위해 만델라넬슨재단(Nelson Mandela Foundation)과의 협업도 필요하다.

◇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만시지탄(晩時之歎)

최근 모 방송국이 백두산(白頭山) 화산폭발 위험성에 대해 몇 차례 방송을 했다. 일전에 친구와 삼겹살에 소주를 한잔 할 때 “과연 발해(渤海)가 926년 하루아침에 흔적도 없이 살라졌는데 그 원인은 뭘까?”라는 질문이 던져졌다.

동경도립대학(東京都立大學) 화산학자 마치다 히로시(町田洋,まちだ ひろし, 1933년생) 교수는 1992년 일본화산을 조사하다가 백두산에서 1천km 이상 날아온 화산부석(火山浮石)을 발견했다 . 이를 계기로 발해멸망은 백두산화산 폭발과 연관되어 있다는 주장을 했다.

한편, 거란족(契丹族)의 역사서 ‘요사본기(遼史本紀)’에서는 승자의 기록답게 ‘여러 민족의 연합융성은 하늘이 내린 것이었으나, 이미 절정을 넘어 운이 다했으니, 백성의 희망이 불만으로 변했고, 믿었던 것들이 사악으로 되돌아왔다. 국가의 근본들이 모두 내려앉음으로써 백성들의 마음마저 떠났다(~自國本群下離心)’라고 적어놓았다.

발해는 고구려 멸망 30년 만에 주변의 고구려인, 거란족, 말갈족, 돌궐족 등 이민족을 규합해 동방성국(東方盛國)이란 대제국을 건국했다. 228년간 국가를 경영하는데 거란족장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에게 10만 병력을 주면서 ‘5성 대장군(五城大將軍)’ 직함과 ‘요왕(遼王)’이라는 칭호까지 주었으나, 오히려 그는 하극상(下剋上)으로 발해를 침공했다. 특히 903년 발해의 요동정벌에 불만을 가져 이후 20여 차례 침공해 926년 1월 14일 수도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를 완전히 4겹으로 포위해 마지막 대인선 애왕(哀王)을 겁박해 황제자리에 즉위했다.

당시 국제정세는 열국멸망 도미노현상(domino phenomenon)이 있었다. 몽골지역 위구르 제국(Uyghur Empire 744~840)의 멸망, 해족(奚族)과 습족이 거란(契丹)에 병합, 중국본토 중원(中原)에선 당나라 멸망, 5대 10국가 혼란기에 접어들었고, 한반도(韓半島)는 후삼국으로 분열했다. 두말할 필요 없이 가장 큰 원인은 발해국의 내부분열이었다. 말갈족과 당의 연합, 황족(皇族)인 대문예(大門藝)는 발해를 배신하고 당나라로 망명, 이민족의 연합체인 발해지도층은 사분오열(四分五列)해 대립, 발해황제라는 애왕(哀王)은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로 전락, 마침내 거란 20만 대군이 상경성(上京城)을 함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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