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격차론
한일격차론
  • 승인 2019.08.06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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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재
기획특집부장
기미가요 한 구절을 불러주면서 일본 국가는 무게가 있다며 감회에 젖던 선생님의 모습이 기억난다. 70년대 대구의 어느 ‘국민’학교 5학년 교실에서였다.

애국가는 가사도 구질구질하게 4절까지나 있다고 그는 비아냥거렸었다. 옛날에는 교사도 칼을 차고 교단에 섰다는 얘기를 부럽다는 투로 가끔씩 했었다.

그때 나는 그 선생님이 교사가 칼을 찬다는 것을 왜 부러워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칼을 차고 교단에 선다 해도 마음대로 휘두를 수도 없을 것이고, 무엇보다 그가 아이들을 꼼짝하지 못하게 통제하는 데에는 손바닥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 마치 칼 찬 군국주의자처럼 행동하는 교장을 보고는, 그 세대 남자들은 집단주의적 권위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을 공유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다. 그 연배의 어른들은 일본인으로부터 받은 부당한 대우와 차별에 대해 분노를 나타내면서도, 말이나 행동에서 그 시대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이 종종 드러났었다.

‘교사의 칼’ 이야기도 어떤 확신에서라기보다는 그가 사범학교에 들어갈 때 꿈꾸었던 교사의 모습에 대한 그리움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문교부’에서 민족주체성 교육을 한창 강조하던 시기였는데도 그런 말을 스스럼없이 아이들 앞에서 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아이들도 그 선생님의 말에 대해 그런가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아이들은 이미 겉으로 일본을 욕하면서 속으로는 일본을 부러워하는 어른들에게 익숙했다. 남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하는 말과 ‘우리끼리’ 하는 말은 다르다는 것을 알 정도의 눈치는 있는 나이였으니까 말이다.

실은 아이들도 어른들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보온물통에서 물을 따르면서 어른들이 하던 ‘역시 일제는 달라’라는 감탄은, 재일교포 친척에게 선물 받은 ‘샤프’ 꼭지를 누르는 아이들 입에서도 똑같이 흘러나왔다. 그러면서도 역사 시간에는 일제의 만행에 대해 분개를 했고, 만화방에서는 각시탈이 왜경에게 복수를 하는 장면에 통쾌해 했다. 세대별로 정도의 차이가 나기는 하겠지만, 일본에 대한 비난과 선망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함께 붙어있었다.

80년대 말 경, 부산의 어느 무허가 침술원에 간 적이 있었다. 넓은 온돌방 가득 사람들이 침을 꽂고 눕거나 엎드려 있었다. 나도 허리에 침을 꽂은 채 엎드려 있는데, 침 맞으러 온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려왔다. 어떤 사람이 재일교포 사업가인 듯한 사람에게 침이 마르게 일본 칭찬을 하고 있었다. “그때는 덴노헤이카가 어디 사람인 줄 알았습니까”, “한국은 아직 멀었습니다” 등등 아첨이 민망함을 넘어 화가 날 지경이었다.

문득 그 장면이 떠오를 때마다 왜 그때 한 마디 하지 못하고 잠자코 있었을까 하고 자책을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대놓고 그런 말을 하는 게 이상했을 뿐,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은 그리 드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후로도 일본에 다녀온 사람들 중에는 우리는 절대 일본을 못 따라간다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케케묵은 지난 일들 줄줄이 떠오른 것은 한일 무역전쟁 와중에 들려온 ‘기술 격차 50년’이란 말 때문이다. ‘한일격차론’’은 그러니 열심히 노력하자는 다짐으로, 때로는 한국은 절대 안 된다는 자기비하로 자주 들었던 이야기였다. 요컨대 일본처럼 되기를 갈망했던 세대의 담론이다. 지금 한일격차론이 새삼스럽게 들리는 것은 일본을 따라잡아야할 존재로 보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일본에 다녀온 사람들도 일본을 부러워하지만은 않는다. 그쪽이나 이쪽이나 서민들 살아가기 팍팍한 건 마찬가지라는 얘기도 자주 들리고, 민주주의의 잣대로 본다면 한국의 정치가 일본보다는 여러 수 위라는 말도 들린다. 무역전쟁이 이미 시작됐으니 서로 간을 보는 선에서 봉합되기는 어려울 것이고, 원래 자리로 돌아갈 수도 없다. 이 싸움이 우리가 욕망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앞으로 추구해야할 사회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하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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