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것을 오래도록 빌리고 돌려보내지 않는다면 (久假而不歸)
남의 것을 오래도록 빌리고 돌려보내지 않는다면 (久假而不歸)
  • 승인 2019.08.15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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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규
전 중리초등교장
지난 6~7일 8호 태풍 프란시스코가 우리나라의 동해안을 지날 때였다. 태풍이 밤중에 대구를 지난다고 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비가 오지도 않고, 바람이 아주 고요하였다. 대경예임회에서는 7일(수요일) 동해안의 영덕 축산항 에 있는 대소산(봉수산)과 영해 괴시리 전통마을을 갔다. 영덕 축산항에 도착하니 태풍이 언제 지나갔냐는 듯이 의외로 쾌청하였다.

괴시리에는 고려시대 삼은(三隱)의 한 사람인 목은 이색(李穡)의 기념관이 있다. 목은 이색이 태어난 외가다. 외할아버지는 함창 김씨, 외할머니가 영양 남씨이다. 현재 영양 남씨 집성촌에 이색 기념관이 있는 까닭이다.

목은 이색의 아버지는 고려시대 가전체 작품 ‘죽부인전(竹夫人傳)’을 쓴 가정 이곡(李穀)이다. 이곡의 수필 ‘차마설(車馬說)’은 고등학교 문학에도 나온다.

‘내가 집이 가난해서 말이 없으므로 혹 빌려서 타는데, 여리고 둔하여 걸음이 느린 말이면 비록 급한 일이 있어도 감히 채찍질을 가하지 못하고 조심조심하여 곧 넘어질 것같이 여기다가, 개울이나 구렁을 만나면 곧 내려서 걸어가므로 후회하는 일이 적었다. 발이 높고 귀가 날카로운 준마로서 잘 달리는 말에 올라타면 의기양양하게 마음대로 채찍질하여 고삐를 놓으면 언덕과 골짜기가 평지처럼 보이니 심히 장쾌하였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위태로워서 떨어지는 근심을 면치 못하였다. 아! 사람의 마음이 옮겨지고 바뀌는 것이 이와 같을까? 남의 물건을 빌려서 하루아침 소용에 대비하는 것도 이와 같거늘, 하물며 참으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랴. 그러나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이 빌리지 아니한 것이 없다.(중략) 그 빌린 바가 또한 깊고 많아서 대개는 자기 소유로 하고 끝내 반성할 줄 모르고 있으니, 어찌 미혹(迷惑)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곡(李穀)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치고 빌리지 않은 것이 없다고 말한다. 임금은 백성으로부터 힘을 빌리고, 신하는 임금으로부터 권세를, 자식은 부모로부터 힘과 재산을 빌려서 가지고 있단다. 빌린 것이 너무 많은 까닭에 자기 소유로 생각하고 반성할 줄 모르는 것이 마치 무엇에 홀려서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마치 그 모습이 말을 빌려 타는 이치와 같음을 느껴서 쓴 글이다.

차마설의 끝부분은 맹자가 ‘구가이불귀(久假而不歸)하면 오지기비유야(惡知其非有也)인저,’라고 말한 부분을 인용하였다. ‘남의 것을 오랫동안 빌리고 돌려주지 않는다면, 어찌 그것이 자기의 소유가 아닌 줄 알겠는가?’라는 뜻이다.

맹자는 ‘요임금과 순임금은 어짊(仁)을 본성으로 하여 백성을 다스렸으며, 상(은)나라의 탕임금과 주나라의 무왕은 어짊(仁)을 힘써 체득하여 백성들에게 이롭게 하였으며, 춘추 오패는 어짊(仁)을 빌려서 백성들에게 가르쳤다. 춘추 오패들이 남의 것을 오래도록 빌리고 돌려보내지 않는다면, 어찌 그것이 자기의 소유가 아닌 줄 알겠는가?’하였다.

중국 춘추시대 오패는 제 환공, 진(晉) 문공, 진(秦) 목공, 송 양공, 초 장왕을 주로 일컫는다. 힘으로 어짊의 정치를 가장한 패자들이다. 패자들의 마음엔 반드시 얻어야 할 큰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땅을 넓히든가 큰 무엇인가를 얻으면 백성들은 어떻든 즐거워하며 날뛰며 좋아하기 때문이다. 오패는 무력으로 남을 복종시키기를 좋아했다. 어짊(仁)을 빌려서 백성들에게 가르치면서 떠받들어짐을 택했다. 윤리의 힘이 아니었다.

어짊을 따르는 것은 마음속으로부터 기뻐서 정말로 감복해야 한다. 칠십 명이 되는 공자의 제자들이 스승에게 감복된 이끌림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 목은 이색은 고려 말에 성리학 발전에 공헌하였다. 문하에는 정몽주, 길재, 이숭인, 정도전, 권근 등 제자들이 많았다. 성리학은 조선의 국시로 더욱 발전하였다.

고려 말의 고승 나옹선사의 출생지도 영해 가까운 창수 갈천리이다. 여주 신륵사 나옹선사의 석종비문은 이색이 썼다.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두 사람은 아주 각별했던듯하다.

나옹선사는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하고 읊었다. 남의 것을 오래도록 빌리고 돌려보내지 않는다면, 어찌 그것이 자기의 소유가 아닌 것을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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