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동화
촛불동화
  • 승인 2019.08.21 20:5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근영

불면 꺼질 듯 아니 다시 피어날 듯, 불탄 집을 배경으로 남은 건 사루비아였다

신양리, 한 조손祖孫가정 출출한 마당 귀퉁이가 쓰린 위장처럼 벌겋게 달아오를 때, 입술로 쪽 빨면 달콤했던 꽃의 기억이 촛농처럼 녹아내리고 있었다 생살 떼어낸 슬픔이 화석처럼 쌓여가던 새벽 다섯 시 요강을 찾는 여섯 살 어린 손주를 위해 할머니가 켜 둔 촛불이 울다 잠든 아이의 헛발질에, 툭 떨어져 집은 전소되고 말았다

여섯 달 치 전기료 15만 원을 못내 불길은 검은 연기를 내뿜고 좁은 방안은 점점 위독해졌다고 신문의 기사가 발화하는 동안 촛불의 슬픈 동화는 맥없이 찢겼다 어린 손자와 할머니의 유골이 인근 야산에 매장되고 나서야 무관심하던 사람들은 누가 저 지경이 되게 내버려 뒀느냐고 서로 탓하며 분개했다 깨어져 아픈 몸짓만 흥건한 아홉 평, 집이 있던 자리에는 어린아이가 관심을 받아본 건 그날 그 사건뿐인 듯, 뿔뿔이 사라지기 위해 기웃거리는, 말라가는 꽃잎의 소란만 붉게 남아 있었다

반짝 빛나다 사그라진 바람이 읽어준 동화의 배경 그림에는 요강처럼 움푹한 세월을 더듬으며 퉁퉁 불어 오른 오줌보를 움켜쥔 아이와 촛불과 사루비아가 빨간 봉오리로 닮아가며 피고 있었다

◇문근영(文近榮)= 1963년 대구출생, 효성여자대학교 졸업, 열린시학 신인작품상(15), 눈높이 아동문학상에 동시 ‘눈꺼풀’ 외 15편당선(16),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나무’ 당선(17), 서울문화재단 창작 지원금 수혜(18),신춘문예 당선자 시인 선 당선,금샘 문학상 당선.

<해설> 붉은 꽃을 총상(總狀) 화서로 피우는 깨꽃(샐비어)이 손자와 할머니 지독한 고통을 함께 함몰한 그 집 배경으로 등장하는 고고한 애상의 나래에 아찔한 현기증이 인다. 세상사는 이처럼 먼 기억에서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바람 앞 촛불 같은 인생이 많다. 이 세상 바깥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한순간 반짝이다 움푹한 세월 내부로 사그라지고 마는 슬픈 자화상의 삶들이 오늘도 우리 기억 밖으로 묻히고 있다. 상지의 시다.
-제왕국(시인)-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