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언불신(有言不信)
유언불신(有言不信)
  • 승인 2019.09.24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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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재 기획특집부장
믿을 신(信)은 사람 인(人)과 말씀 언(言)을 합쳐서 만든 글자다. 그 이전에는 사람 인과 입 구(口)를 결합한 글자를 ‘믿다’라는 뜻으로 쓰다가, 口를 言으로 교체해 뜻을 더 명확히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옛 사람들이 ‘믿음’과 가장 밀접한 연관을 가진 것이 바로 ‘사람이 하는 말’이라고 여긴 것이다.

‘믿다’를 뜻하는 글자가 이런 모양으로 만들어진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의 말이 모두 믿을 만했기 때문일까? 요즘 사람들보다는 거짓말을 덜 했을지 모르겠지만, 그들도 호모 사피엔스이니 거의 본능적으로 거짓말을 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와 반대로 당시에도 사람들이 워낙 거짓말을 많이 해서 ‘사람의 말은 믿을 수 있어야 한다’라는 당위성을 글자에 담은 것일까? 글자 형성 단계에는 무엇보다 모양을 보고 의미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을 텐데,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도덕률에 따라 글자를 만들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옛 사람들이 ‘사람+말’을 ‘믿다’라는 의미로 수용할 수 있었을까? ‘말’보다 ‘믿다’ 쪽에서 생각을 해보면 실마리가 풀린다. 우리는 직접 본 사물이나 직접 겪은 사건은 그랬기 때문에 ‘안다’. 직접 보지 않은 사물, 겪지 않은 사건도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그럴듯하다고 판단되면 그렇다고 생각하게 된다. 즉 ‘사람의 말’을 듣고 ‘믿는다’. 타인의 말에 기대고 있는 ‘믿을 신’자에는 그래서 늘 불신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며칠 전 비가 오는 날, 신도시의 한적한 네거리에서 우회전을 할 때였다. 앞서 가던 차가 두 번째 횡단보도 앞에 서더니 움직이지 않았다. 그 횡단보도에는 파란불이 들어와 있었지만 건너는 사람도 건너려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앞 차의 브레이크 등은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차를 피해 횡단보도를 통과했다. 한참 뒤에 백미러로 보니 그 차는 아직 그 자리에서 횡단보도 신호등이 바뀔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초보운전도 아닌 것 같았는데 왜 저러는 것인지 궁금했다.

다음날 그 의문이 풀렸다. 지인으로부터 우회전 통행방법이 바뀌어서 이제부터 파란불에 지나오면 단속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무실 동료가 그 소식을 전해줘서 다들 그렇게 알고 있다는 것이다. 어제의 그 운전자도 그런 가짜뉴스를 믿었던 것 같다. 나는 만약 교통법규가 그렇게 바뀐다면, 전 국민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신문 방송에서 관련 보도가 쏟아져 나왔을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이전에도 하이패스 통과 시 30km/h가 넘으면 단속한다는 이야기나, 전화 설문조사에서 ‘독도는 우리땅’이라고 1번을 누르면 돈이 빠져나간다는 이야기가 SNS를 통해 널리 확산된 적이 있었다. 최근에는 미국의 한 남성이 강아지 구충제로 폐암을 완치했다는 유튜브 동영상이 SNS를 통해 빠르게 확산하면서 강아지 구충제가 품절되기도 했다.

‘믿을 신’자가 만들어질 시절에는 직접 대면해 말을 듣고, 목소리, 몸짓, 표정, 자세 등을 고려해 믿든지 말든지 판단하면 됐다. 오늘날에는 말을 옮기는 수단이 눈부시게 발전하면서 상황이 매우 복잡하게 변했다. 말을 주고받기는 매우 편리해졌지만 그 대신 수많은 말을 스스로 검증해야 하는 스트레스를 받게 됐다. 그러한 스트레스가 점점 커지면서 사람들은 심리적 피로를 느끼게 되고, ‘알다’와 ‘믿다’의 구분이 흐려지는 단계로 넘어간다.

좌회전 방법이나 하이패스 같은 내용은 그나마 웃고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지만, 사람들을 호도하기 위해 악의적으로 가짜뉴스를 만들어 퍼뜨리는 사람들의 해악은 크다. 진실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싶은 것을 사실이라고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내가 믿고 싶은 말은 진실이고 내가 믿고 싶지 않은 것은 모두 가짜뉴스가 된다. 더구나 같은 신념을 가진 사람들끼리 인터넷에서 컬트적 공간을 형성해 서로의 신념을 강화시킨다.

이러한 현상에는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얻고 있던 신문 방송 등 전통적 매스미디어들이 쇠퇴하고, SNS와 유튜브 같은 신생 미디어의 영향력이 커지는 현상과 관련이 있다. 예전에는 신문에 났다, 방송에 났다 하면 일단 그것은 사실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들이 신문과 방송이 가짜뉴스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가짜뉴스다’라고 목청을 높인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우리나라의 언론 불신 현상도 가볍지 않다. 과거 언론탄압이 일상적으로 자행되던 군사독재 시절, 글로 쓸 수는 없지만 토씨 하나 쉼표 하나로 진실을 암시하려 했던 기자들이 있었고, 말하지 못한 진실을 기사의 행간에서 읽어내려는 독자들이 있었다. 그때도 기사 내용을 그대로 믿지는 않았지만, 언론은 믿었다. 그러나 군사독재가 끝난 뒤, 특히 IMF구제금융 시대를 지나면서 언론은 길을 잃은 것 같다. 기사가 뒤섞이고, 사실과 의견이 뒤섞이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러다보니 이제 언론은 사실을 보도한다고 말하지만 독자는 그 뒤에 숨은 언론의 의도를 의심한다. 주역 곤(困)괘에는 유언불신(有言不信)이란 구절이 있다. 곤궁한 사람의 말은 믿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리스 신화에는 아무도 믿지 않는 예언가 카산드라가 있다. 오늘날의 언론의 모습이 겹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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