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종이를 손에 들면
화가는 사물과 일체가 되어
바람이 되고 빛이 되어서
심혈을 기울여 그림을 그려서
예술의 액자로 장식하겠지
흰 종이를 손에 들면
시인은 영원의 문을 두드리고
사랑과 생명의 소중함을 빛내어
몸부림치는 영혼의 고뇌와 암울함을
빛 가운데 드러내어
모든 현상의 표리를 담담히 서술하겠지
흰 종이를 손에 들면
아이들은 낙서하고
접어서 푸른 하늘에 날리겠지
만약 흰 종이가 없다면
화가도 시인도 아이들도
꿈을 좇는 일은 없을 것이다
◇데라구치 히사꼬= 1947년 일본 오오사카출생. 창작21작가회 동화부문 신인상등단(12),시, 작사, 하이쿠, 단가 활동,아송문학회원, 단가느릅나무elm회원.
<해설> 여백의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은 꿈을 가진 사람이다. 왜 비어 있을까? 어느 시인은 ‘힘든 사람들이 쉬어 가라고 비워 놓은 자리’라 했다. 하얀 종이는 바로 그런 여백이다. 누구나 다가가 꿈을 펼칠 수 있는 공간. 그러기에 흰 종이는 누구나 사랑하는 여백인 것이다. -정광일(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