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장 가시에 감춰진 부드러운 속내
선인장 가시에 감춰진 부드러운 속내
  • 황인옥
  • 승인 2019.11.17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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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일 호반갤러리 ‘조각가 이태호’展
선인장의 강인한 생명력 예찬
생존 위해 ‘잎→가시’ 식물 변모
유목적 삶 사는 현대인과 닮아
날카로움·부드러움 대조 요소
생명 영속 위한 유기적 관점 시사
본질(本質essence) , 가변설치 , 혼합재료 ,2019
이태호 작 ‘본질(本質essence)’

의자 하단 네 다리 사이에 초록 선인장이 고개를 내밀었다. 뾰족한 침으로 감싼 의자의 불안한 상태와 선인장의 싱그러운 자태가 대척점을 달린다. 불안함의 극치를 달리는 위태로운 의자 아래 소담하게 솟아난 선인장에 연민을 느낄 법도 하지만 사실은 지극정성으로 돌볼 까닭은 없다. 햇빛이나 물을 필요로 하진 않기 때문. 조각가 이태호의 작품이다.

이태호 조각가가 수성아트피아 초대전에 선인장 작업을 원없이 풀었다. 선인장을 모티브로 한 30여점의 조각 작품을 선보인다. “선인장 조각을 15년 했지만 아직도 표현하고 싶은 것들이 많아요. 선인장이 주는 창의적 발상은 끝이 없는 것 같아요.”

선인장 작품의 탄생 비화는 2002년 어느 봄날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작가는 당시 대학 선·후배들과 함께 경북 경산시 자인면 공동작업실에서 작업활동을 했다. 선인장과의 첫 대면은 그해 봄 어느 날이었다. “우연히 깨진 화분에서 연초록 싹이 돋아나는 것을 발견했어요.” 당시 그는 선인장의 강인한 생명력에 감탄해마지 않았다. 혹독했던 겨울 찬서리를 맞고도, 그것도 깨진 화분에 몸을 의지하고서도 거뜬하게 새싹을 피워낸 선인장에서 숙연함을 느꼈다. “화분 속 식물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가까이 가봤더니 선인장이었어요. 그때부터 선인장의 강인한 생명력을 예찬해 왔어요.”

이태호가 선인장 조각을 하자 사람들이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산(山)과 섬(島), 점(點)과 우주(宇宙) 등을 모티브로 불교적 색채가 짙었던 이전 작업들과 결이 크게 달랐던 것. 당시 작가는 원이 작아지면 점이 되고, 원이 커지면 우주가 되는 형이상학에 대한 이야기를 조각으로 풀어냈다. “점은 너무 작아서, 우주는 너무 거대해서 인간의 눈으로 볼 수가 없고(無), 둘 다 볼 수 없다는 것은 결국 점과 우주는 둘이 아닌 하나(不二)라는 이야기를 해 왔었어요.” 선인장은 점과 우주의 중간지대인 인간세상으로의 귀환에 해당됐다.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선인장의 강인한 생명력을 통해 희망을 전하고 싶었어요.”

흔히 선인장의 강인한 생명력에 매료된다. 범인(凡人)이라면 거기서 멈추겠지만 선인장을 조각하기로 마음먹은 작가의 태도는 좀 달랐다. “과연 그 강인함이 어디에서 나오는가?”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해 선인장 탐구에 본격 나선 것. 선인장의 ‘본질과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제대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새로운 판도라 상자 하나가 열렸다. 강인함 이전에 부드러움이 먼저 존재했다는 사실의 발견이었다. 그가 “선인장의 가시는 본래 잎이었는데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변했다. 먹이가 부족한 사막에서 부드러운 잎은 천적들의 먹이가 되기 쉽고, 수분 증발도 높아 생존에 방해가 됐다”며 잎이 가시로 변한 내력을 살폈다.

선인장의 실체가 파악되자 또 다른 현상이 선인장에 겹쳐졌다. 선인장의 진화에 현대인의 자화상이 겹쳐진 것. “끊임없이 더 나은 환경으로 나아가기를 욕망하며 유목적인 삶을 사는 현대인과 선인장이 언젠가는 가시를 다시 잎으로 변화 시키고 싶은 열망이 닮아 보였어요.”

이번 전시에는 개념이 더욱 부각된다. 강한 생명력이라는 선인장의 상징성 위에 삶의 지혜나 깨달음이라는 긍정의 메시지를 부가한다. 조각의 구성이나 형상 등에 인생의 깊은 체험이나 깨달음을 잠언이나 경구의 형태로 간단명료하게 이식하는 것. 이는 전시제목을 ‘아포리즘(aphorism·긴 문장의 설교를 가장 짧은 말로 간결하게 전달하는 형식)’이 된 이유다. “선인장은 곧 생명력이라는 것을 강하게 인식하기 위해 제목도 아포리즘으로 정했어요. 이전 작업보다 더 개념적이 되었죠.”

개념은 강함과 부드러움의 극적 대비로 최적화된다. 작품 ‘실존’에서 철조망으로 선인장의 형태를 만들고 잎의 표면에 부드러운 솜을 넣었다면, 작품 ‘본질’에서는 날카로운 핀으로 잠식된 의자 밑 부드러운 솜 안에 선인장을 조각하는 식이다. “날카로움과 부드러움은 대척점에 있는 개념이 아니라 생명 영속을 위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또 다른 작품 ‘유혹(Temptation)’은 선인장의 형태를 버리고 카펫으로 선인장을 개념적으로 접근했다. “카펫이 주는 부드러움과 화려한 색상은 만지고 싶은 유혹이 들지만 그 속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숨어 있다는 것을 선인장의 화려한 꽃과 날카로운 가시로 대입시켜 보았어요.”

선인장 조각으로 생명예찬에 집중해온 이태호. 작가가 선인장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을 표명했다. 선인장을 조각하는 작가가 드물다는 것에서 오는 개별성, 작업기간에 비례해 희열감이 높다는 점 등에서 “만족한다”고 했다. “선인장의 변화는 무궁무진해요. 계속해서 새로운 재료나 작업기법을 통해 선인장 표현에 대한 발상 자체가 주는 즐거움도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아요.” 전시는 19일부터 24일까지 수성아트피아 호반갤러리에서, 오프닝은 19일 오후 6시에. 053-668-1566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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