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앞서 큰 아픔을 겪어 봤으니, 후일의 환난을 미리 삼가리라(懲毖)
내가 앞서 큰 아픔을 겪어 봤으니, 후일의 환난을 미리 삼가리라(懲毖)
  • 승인 2019.11.21 21:1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동규
전 중리초등학교 교장
“정부 임기 절반이 지났을 수도 있고, 임기 절반이 남았을 수도 있는데, 저는 임기 절반이 남았다고 생각합니다.”

19일 ‘국민과의 대화’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마무리 발언으로 한 말이다.

국민 패널 300명 중에서 정곡을 찌르는 질문도 없었지만 대통령 답변 또한 명쾌하지 않은듯 했다. ‘임기 절반이 남았으니 ……이렇게 하겠다.’는 진솔한 내용이 없었다. 미래지향적인 분명함이 없어 아쉬웠다.

얼마 전 11월 첫째 주 수요일 대경예임회에서 학가산(鶴駕山)에 갔었다. 학가산 중대바위 아래에는 ‘서미리’마을이 있다. 이곳은 서애 류성룡이 말년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난 ‘농환재(弄丸齋)’가 있었다고 한다. 서애는 ‘안동의 서쪽에 있는 아름다운 마을’이라는 뜻에서 동네의 이름을 ‘서미리’로 고쳤다.

서애는 ‘즐겁게 지낸다.’는 마음으로 서미리에 초가집 ‘농환재’를 지었다. 그곳에서 서애는 자제들에게 ‘사람이 이익과 욕심에 빠지면 염치(廉恥)를 잃어버린다. 염치를 잃어버리는 것은 모두 만족할 줄 모르는데서 나오는 것이다. 이 집이 비록 누추하지만 비바람은 가릴 수 있고 추위나 더위를 막을 수 있다. 사람이 자기가 처한 환경에 따라가면서 걱정스러움이 없다면 어느 곳엔들 살지 못하겠느냐?’고 자주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요즘 어느 전직 장관에게 ‘염치(廉恥)를 모르는 뻔뻔한 사람’이라고 국민들의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이익과 욕심에 빠지지 않은 서애의 농환재 삶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서애는 ‘농환재’의 누추한 곳에서도 올곧게 살았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국민과의 대화에서 아직도 전직 장관이 왜 뻔뻔하고 염치가 없는지를 모르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학가산을 내려와 하회마을 앞의 부용대에 갔다. ‘농환재’에서 살기 이전, 서애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7년 후 정유재란 때 북인의 탄핵을 받았다. 그 때 하회마을로 돌아와 북쪽에 있는 부용대의 옥연정사에서 ‘징비록(懲毖錄)’을 썼다.

‘징비(懲毖)’는 ‘여기징(予其懲) 이비후환(而毖後患)’에서 나온 말이다. ‘내가 앞서 큰 아픔을 겪어 봤으니, 후일의 환난을 미리 삼가리라.’는 뜻이다. 시경의 ‘소비(小毖)’에 있다.

문왕의 아들 무왕은 강태공을 기용하여 은나라의 폭군 주왕(紂王)을 물리치고 통일된 왕국 주나라를 세웠다. 주나라를 세운지 3년 만에 무왕은 죽고 어린 아들이 2대 왕위에 올랐다. 주나라 성왕이다. 어린 성왕 주변에는 강태공, 소공 석, 주공(성왕의 삼촌)이 있었다.

어린 성왕이 묘당에서 이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내용이 ‘소비(小毖)’다.

‘내가 앞서 큰 아픔을 겪어 봤으니/후일의 환난을 미리 삼가리라./꿀벌을 손에 놓고 어루만지다/아프게 쏘인 것 그 누구던가/그리고 몰랐다 작은 뱁새가 커서/하늘 높이 나르는 큰새 될 줄은/아직도 힘들고 고된 일과 불운은 아니 가시어/사느니 여뀌 풀 그 맛이어라.’

‘여뀌 풀’은 잎과 줄기를 짓이겨 물에 풀어서 물고기를 잡는 독성이 있는 식물이다. 아직 어수선한 나라를 다스리려고 하니 신하들의 많은 도움이 필요함을 읊은 시이다. 주공은 어린 조카를 잘 보필하여 주나라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 시에서 ‘징비(懲毖)’를 따와 서애는 옥연정사에서 임진왜란 이후의 생생한 기록을 쓰기 시작하였다. 임진왜란의 근본과 시작을 알리기 위함과 임진왜란 전쟁의 참혹한 싸움터를 알려 후일엔 다시는 이러한 환난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 징비록을 쓴 방이 옥연정사의 원락재(遠樂齋)이다. 나를 사랑해서 찾아와줄 친구를 생각해서 마루 이름은 애오헌(愛吾軒)이라 하였다. 그리고 마당엔 ‘천년을 지나 하늘 높이 솟으면 봉황의 보금자리가 되리라.’는 뜻에서 소나무를 심었다. 서애의 나라사랑하는 애틋한 마음이 스쳐 지나갔다.

사실 문재인 대통령도 “내가 임기 절반을 넘기면서 ‘이러이러한 아픔을 겪어봤으니’ 남은 임기 절반은 ‘후환이 될 만한 이러저러한 일은 결코 삼가리라.’고 다짐을 합니다.”고 했으면 어땠을까? 그리고 믿음직한 인재를 발굴하여 미래의 확실한 그림을 제시했으면, 그랬으면 국민과의 대화는 옹골찼을 텐데…….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