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살아서 건너가자”
“고통을 살아서 건너가자”
  • 황인옥
  • 승인 2019.11.25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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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천영애 세 번째 시집 발간
동생의 죽음으로 존재 본질 성찰
타인과 관계 맺고 살아가는 인간
적당한 거리 ‘사이’로 고통 해소
완전무결한 존재 ‘신’은 존재하되
자유의지 가진 인간 편에서 지지
 
 
천영애시인
시인 천영애

 

천년의 시 펴냄/96쪽/10,000원
천년의 시 펴냄/96쪽/10,000원

“그날,/아우를 잃고 돌아와서/시래깃국을 끊인다/시래깃국에서/둥둥 떠다니는/아우의 누런 살...”.

고작 160g 남짓한 시집을 건네받았는데 제목을 보는 순간 시집의 무게가 천근만근으로 다가왔다. ‘무간을 건너다’라는 제목에서 신과 인간이라는 철학적인 주제를 읽은 까닭이다. 그즈음 시인이 무거운 사연 하나를 펼쳐놓았다. “동생의 죽음을 겪으면서 화두 하나가 묵직하게 다가왔노라”고. 시인이 거두절미하고 “이번 시집에는 신과 존재의 문제를 다뤘다”며 이번 시집의 주제부터 언급했다.

“동생이 유명을 달리하고 장례를 치르면서도 실감을 하지 못하다가 화장한 후 남은 뼈를 보자 비로소 죽음을 인지했다. 그 뼈에서 존재의 실체를 발견한 것 같다.”

지역의 중견작가인 천영애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무간을 건너다’가 출간됐다. 2015년 펴낸 두 번째 시집 이후 4년 만이다. 이번 시집에서 담론을 촉발하는 핵심 시어는 ‘무간(無間)’. 고통이 간극(間隙)이 없이 계속되는 상황을 의미한다. 생로병사로 점철된 인간세상을 이름이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 수록된 시 ‘무간을 건너다’를 시집의 제목으로 선택했다. 고통으로 점철된 세상을 건넌다는 의미에 부합해 선택한 제목이다. 

일반적으로 무간을 건넌 세상은 죽어서 도달하는 세계를 의미한다. 그것도 ‘윤회를 끊은 열반의 상태’다. 하지만 시인은 좀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죽어서가 아닌 살아서 만나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시인은 “인간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불안이나 두려움, 고통을 살아서 건너가자는 이야기를 하려했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시인은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자인 사르트르가 “타인은 고통”이라고 한 말을 언급하며 이에 대한 부연설명을 이어갔다. “인간의 모든 고통도 관계로부터 생겨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타인이 변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그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 내 안에서 해결책을 찾는 수밖에 없다”는 논리였다.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관계로부터 오는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시인이 지목한 개념은 ‘사이’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적당한 사이를 둘 때 관계로부터 오는 고통에서 해방 될 수 있다는 논리다. 그에 따르면 ‘사이’는 시인이 인간과 인간, 인간과 신, 인간과 사물과의 관계를 설정할 때 가장 먼저 염두에 두는 철학적 언어다. “‘사이’의 철학은 사르트르의 말처럼 타인이 나의 지옥이 되는 것을 방지하고, 무간을 건널 수 있는 단초가 되어 줄 것이라고 믿는다.”

불완전한 인간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곳은 신이다. 인간은 완전무결한 존재인 신에 의지해 현세의 고통이 격감되기를 희망하며 영원한 생명에의 염원을 불태운다. 하지만 시인은 범신론자라고 스스로를 규정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해서는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보다는 인간의 자유 의지에 희망을 거는 편에 선다. 인간 고통의 근원인 관계의 문제를 ‘사이’를 이용해 조절하는 방식으로 해소해 나가자는 입장이다. 시인은 시 ‘무간을 건너다’에서 “.../영원을 믿지 않는 사람이/퇴방 속의 밥을 먹는다/퇴방에는 간극이 없다/오직 지극한 한 숟갈의 밥...”라고 강변한다.

이번 시집에서 두드러지는 또 하나의 특징은 다양한 그림들을 시의 소재로 활용한다는 것. 그림들은 시인의 시에서 문자로 녹아나기도 하고, 그림 자체가 시가 되기도 한다. “이번 시집은 그림도 소재가 되기도 해서 읽는 재미가 다양해졌다. 내가 표현하는 시의 언어에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가 미처 사유하지 못한 생활이 곡진하게 다가올 것이다.”

시인은 발표하는 시집마다 바라보는 대상과 주제를 달리했다. 첫 시집 ‘나는 너무 늦게야 왔다’에서 여성으로 살면서 받았던 상처를 풀어놓았다면, 두 번째 시집 ‘나무는 기다린다’에서는 세상을 보다 관조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견지했다. 그리고 세 번째 시집에서는 보다 철학적인 접근법을 택했다. 신(神), 죽음, 삶, 운명 등이 주된 관심사가 됐다. 시인의 시집이 쌓여갈수록 시는 더욱 난해해지고 낯선 시어들도 많아졌다. 시인은 이 지점에서 예술을 이해하기 위한 독자들의 노력을 언급했다. 시가 난해할 수밖에 없고, 적어도 시를 읽는 독자라면 이 난해함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 정도를 해야 한다는 견해였다.

그녀가 “시가 쉬우면 좋겠지만 예술은 본래 쉬운 것이 아니”라고 선부터 그었다. “시는 다른 예술과는 달리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문자로 쓰여져 있어 읽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 의미를 이해하는 독해는 어렵다. 그러므로 독해를 위한 훈련이 필요하다.”

난해함을 굳이 두 팔 벌려 환영할 것 것까지야 없지만 예술분야에서 난해함은 독배일수도 또는 성배일 수도 있다. 특히 현대시나 현대미술 등 현대 예술 관련 장르에서 그렇다. 어쩌면 난해함을 밑장으로 깔아야 제대로 맛을 살린다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 시인이 “일상언어로 산문을 쓰는 데는 한계가 없지만 시는 일상 언어가 될 수 없다”며 “그런 측면에서 내 시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고 고백했다. 종국에는 동시보다 쉬운 시를 쓰는 것이 목표지만 지금은 난해한 언어들이 필요한 시기라는 의미였다. “다음 시집은 더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어렵더라도 나는 끝까지 한번 가보고자 한다.” 비우기전에 채우는 일을 아직은 계속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황인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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