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짧은 가을 동화
11월, 짧은 가을 동화
  • 채영택
  • 승인 2019.11.25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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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단상]
배은희
대구대산초등학교 교장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오히려 눈에 띌까 다시 걸어도 되오면 그 자리에 서졌습니다.’

담벼락 모퉁이에 서있는 커다란 모과나무는 큼직한 모과를 주렁주렁 달고 아침 햇살 아래 서 있습니다. 햇살에 되비친 샛노란 그늘 아래 한 소년이 애꿎은 흙바닥만 비벼 되며 오늘도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신발 밑에 비벼진 바닥이 반질반질 윤이 납니다.

가끔씩 초조한 눈길로 올려다보는 2층 창문에는 튤립이 곱게 수놓인 하얀 레이스만 무심한 듯 바람에 흔들립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요란한 쿵쾅거림 뒤에 육중한 철문이 소란스럽게 열리며 노란 리본을 토끼 귀처럼 양쪽에 매달고 있는 깜찍한 소녀가 가을을 담은 감색 원피스를 나풀거리며 폴짝 뛰어나옵니다.

“어! 또 왔네! 많이 기다렸어?” “아니, 많이 안 기다렸어.”

“책가방을 챙기느라... 어서 가자.” “괜찮아 천천히 가면 돼.”

소년은 기다리는 내내 초조했던 그 마음을 들킬까 봐 햇빛에 반짝이는 소녀의 구두 콧등만 쳐다보며 걷습니다.

소녀는 어색해하는 소년을 힐끗 쳐다보며 먼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김철수.” “그 이름 참, 멋지구나!”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최……”

가을이는 갑자기 노래를 끊고 샛노란 은행잎만 골라 밟으며 몇 발자국 앞서더니 다시 말을 이어갑니다.

“철수야, 나는 가을보다 봄이 더 좋은데, 사람들은 나를 가을이라고 생각하며 그렇게 불러. 내 이름에는 나의 존재와 가치가 담겨 있지 않은데….”

철수는 가을이가 말하는 존재와 가치가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최가을이라는 이름이 가을이를 다 말하지 못한다는 것은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은 나를 최부잣집 딸이라고 부르는데 이건 더 싫어. 왜냐하면 아빠가 부자지 내가 부자는 아니거든….”

‘그래, 맞아! 우리 집이 가난한 거지 내가 가난한 것은 아니니까... 나는 이다음에 어른이 되면 부자가 되어서 가을이에게 지금보다 더 멋진 2층 집을 지어서 선물할 거니까….’

철수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불끈 솟는 것을 느끼며 종전보다 더 힘차게 걷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나를 차분하며 얌전하다고 하시지만, 나는 집에서 계단을 뛰어다니는 말괄량이고 준비물도 잘 못 챙기는 덜렁이란 말이야... 사람들은 왜 나의 내면을 보지 않고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보고 나를 판단하는지 모르겠어... 요즘 나는 내가 누구일까, 나의 존재와 가치는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중이야.”가을이는 큰 한숨을 쉽니다.

‘아하, 그렇구나! 내 이름이 나를 다 표현하지 못하고, 동네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나도 내가 아닐 수 있구나... 그럼 나는 과연 누구일까’

가을이의 긴 한숨만큼 철수의 고민도 깊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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