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종이 울릴 때
노을종이 울릴 때
  • 승인 2019.12.09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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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상한 과일에 향기가 더 짙고 병든 조개가 진주를 앉히듯 ‘병든 사람이 정상적인 사람보다도 자기의 넋에 더 가까이 가는 사람’이라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말을 떠올려 본다.

얼마 전, 친구는 객지로 떠나보낸 아들의 방을 청소하다가 구석에 숨겨진 박스 하나를 발견했다고 한다. 속을 열어보니 아이가 미처 챙겨 가지 못한 일기장 한 권이 나오더라는 것이다. 모른 채 할까 하다가 평소 말을 아끼는 아이의 표정이 떠올랐다고 한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몇 번을 망설인 끝에 결국 열어보고는 망연자실 주저앉아 한 페이지 채 읽기도 전에 일기장을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는 것이다. 거기엔 ‘새해 다짐’이라는 제목 아래 열 가지, 자신에게 하는 바람이 가지런하게 적혀 있었다고 한다.

그 중 ‘부모님께 용돈 달라고 할 때마다 마음 아파하지 말자’란 문장 앞에서 폭죽 터지듯 펑펑 울음이 터졌다고 한다. 첫 장을 열어볼 때까지만 해도 아들의 일기장을 몰래 엿보는 것만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미가 되어서 아들의 마음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인두로 가슴을 지진 듯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한다. ‘좀 더 물어봐 주고 집중할 걸, 따뜻하게 볼 때마다 안아줄 걸’ 하는 후회가 되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더 마음이 쓰이는 건, 이미 취직을 한, 두 살 아래 동생보다 맏형인 아들은 여전히 더해야 할 공부가 남았다는 것이다.

미래학자 다니엘 핑크는 “어떤 이야기의 결말을 해피엔딩으로 만들려면 주인공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쥐어 주면 된다. 단 그토록 원하던 것이 사실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단 걸 깨닫게 한 후 보내줘야 한다”며 훌륭한 스토리텔링의 비결을 말한다. 그 누가 되었든 살아있는 한 어떤 순간에도 해피엔딩과 새드엔딩을 맞이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다음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상투적 해피엔딩을 만들기는 쉽지만, 감동과 여운까지 남는 결말은 더군다나 어려울 것이다. 어쩌면 해피엔딩이란 프롤로그에 불과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 때문에 진정한 해피엔딩이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마침표가 아니라 새로운 페이지를 펼칠 수 있는 용기를 삶이라는 책갈피 어디쯤 끼워두는 일일 것이다.

그녀의 얘기를 경청하며 ‘강해져야지’보다는 ‘약한 것을 인정하고 보살펴줘야지’ 그래서 이 계절처럼 ‘나도 아름답게 물들어가야지’ 하는 생각으로 마음의 방향을 바꿔보기로 한다. 노을을 보기 위해 노을이 지는 쪽으로 몸을 틀고 앉은 친구, 그리고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을 위해 북아메리카 원주민 수우족에게 구전되어 오는 기도문을 천천히 되새긴다.

“바람 속에 당신의 목소리가 있고/ 당신의 숨결이 세상 만물에게 생명을 줍니다/ 나는 당신의 많은 자식들 가운데/ 작고 힘없는 아이입니다/ 내게 당신의 힘과 지혜를 주소서// 나로 하여금 아름다움 안에서 걷게 하시고/ 내 두 눈이 오래도록 석양을 바라볼 수 있게 하소서/ 당신이 만든 물건들을 내 손이 존중하게 하시고/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내 귀를 예민하게 하소서// 당신이 내 부족 사람들에게 가르쳐 준 것들을/ 나 또한 알게 하시고/ 당신이 모든 나뭇잎, 모든 돌 틈에 감춰 둔 교훈들을/ 나 또한 배우게 하소서// 내 형제들보다 더 위대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장 큰 적인 내 자신을 이길 수 있도록/ 내게 힘을 주소서/ 나로 하여금 깨끗한 손, 똑바른 눈으로/ 언제라도 당신에게 갈 수 있도록 준비 시켜 주소서/ 그래서 저 노을이 지듯이 내 목숨이 사라질 때/ 내 혼이 부끄럼 없이/ 당신에게 갈 수 있게 하소서”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기도란 절대적인 존재, 삶의 근원을 향한 맑은 성찰 같은 것이 아닐까. 그들은 모든 것을 원래 있던 자리에 두려하고 사냥을 해도 앞을 내다보며 불필요한 것을 얻지 않았고 선물을 줘도 누가 줬는지 모르게 두었다고 한다. 이런 기도를 오랜 세월 전해주고 전해 받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맑은 눈빛과 깊은 영혼을 가졌을 것이라 여겨진다. 속물적인 영혼을 급훈처럼 걸어두었던 인생의 교실에 ‘부끄럼 없이’라는 새로운 급훈을 화두처럼 내걸어 본다. 천천히 변해가는 것들이 아름다운 12월의 고요하고 거룩한 밤이 깊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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