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의 명함
그대의 명함
  • 승인 2019.12.12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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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숙
리스토리결혼정보 대표
교육학 박사
아무개 집사람 말고, 정치인 아내 말고.

책 표지 아래 하얀 여백을 메우고 있는 공허한 글자들을 보면서 왠지 가슴이 먹먹하다. 남편의 명함이 아닌 ‘그대의 명함’에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작가의 삶의 여정을 감히 평할 수는 없지만, 북 콘서트에서 만난 그녀의 단아함과 그 모습 뒤에 감춰진 아픔을 떠올리며 수필집을 날밤을 세우면서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남편 K 씨는 정치인으로서 모 방송에서 다문화 포럼을 할 때 바쁜 와중에도 게스트로 축사를 해주러 먼 길을 한걸음에 달려온 내겐 고마운 분이다. 한동안 그의 소식이 뜸해서 궁금했는데, 아내의 수필집 발간 기념일에 북콘서트를 개최한다는 초대장을 받았다.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시골의 날씨는 제법 쌀쌀했다. 그는 일 년 전만 해도 건강하고 건장한 모습이었는데 많이 수척한 모습이었다. 비가 와서 다 둘러보지는 못했지만, 작가의 종택은 산사 아래 마을이 한눈에 보이는 아늑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하객들이 제법 많아 분주한 분위기였다. 따뜻한 대추차 한잔으로 몸을 데웠지만, K 씨의 아픈 소식을 전해 들은 탓인지 내내 마음은 추웠다. 결혼기념일에 맞춘 아내의 출판기념회. 부부의 정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마이크를 잡은 그의 목소리에는 작은 떨림이 있었지만, 힘이 있었다. 진행자가 아내에게 재 청혼의 프러포즈를 권했지만 경상도 남자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어색한 사랑 고백은 못한다며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곧 경상도 사나이답게 겸연쩍고 미안한 표정으로 아내에 대한 애정 표현을 했다. 그들의 사랑이야기는 한 편의 영화 같고 드라마 같았다. 초등학교 동기로 만나서 결혼까지 50년이란 세월을 밀당하며 불같은 사랑을 했다. 그의 얘기를 빌자면, 매일 편지 쓰고, 한밤에도 나가서 만나고 야산에서 모래사장에서 젊음을 불태웠다. 그들은 지독한 사랑을 했다. 하지만, 남편이 젊은 나이에 정치에 뛰어들면서 아내의 이름은 사라지고 누구의 아내라는 명함으로 살아온 세월이었다. 사랑이 깊을수록 외로움과 공허함은 깊어졌다. 작가의 글에서 보면, 정치인의 아내 자리는 참 힘들고 외로운 것 같다. 속 모르는 사람들은 호강에 겨워 투정을 부린다고 생각할는지도 모른다. 공인을 남편으로 둔 여인들의 그 시린 세월의 속사정을 일반인들이 어찌 알까.

진행자가 다시 태어나면 지금의 남편과 결혼할 것인가의 질문에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 해서 좌중이 폭소했다. 얼마나 간절함과 그리움의 세월이 깊었으면 저런 말을 할까. 50년 동안 한 남자와 여자가 같이 한 세월인데 다시 태어나서 다른 남자와 다른 여자를 만나서 살 수 있을까? 이미 그들은 서로의 문화에 동화되었고 닮은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연애할 때는 남자가 여자를 쫓아가지만, 결혼하면 아내는 아이와 남편 뒷바라지하고 남편 바라기가 된다. 남편은 마이웨이를 추구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간다. 외로움은 오로지 아내의 몫이다. 이제 남편이 아프다. 남편은 병마와 싸우면서도 오직 아내의 이름을 찾아주기 위해 고향에서 의미 있는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아내는 이십대에 처음 만난 그 해맑은 모습으로 다시 돌아온 남편을 환영한다.

힘든 여정이었고, 때로는 야속한 남편이었지만 자신의 분신 같은 남편을 아내는 평생을 그리워하며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사랑이 깊을 수록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 또한 크다. 작가는 그 공허함을 수필을 통해 극복하면서 채움의 미학을 터득하였는지도 모른다. 꽃다운 청춘과 젊음을 오직 남편의 이름 뒤에서 묵묵히 길을 걸었던 그녀가 이제 ‘그대의 명함‘으로 세상에 얼굴을 내민다.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가 아닌 ’그대의 명함‘이다. 어릴 적 친구가 평생의 동반자가 된 중년의 부부는 주름진 얼굴과 희끗희끗한 머리칼을 서로 만져주는 진정한 부부가 되었다. 그간 서로 다른 곳을 보던 시선을 맞추며 서로 다른 보폭도 이제야 맞춰졌다. 혼자여도 둘이어도 본질적으로 외로운 존재가 인간이다. 그렇다면 누군가에게 따뜻한 사람이 되어 나란히 같은 길을 걸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인생 아닐까. 1990년대 유행한 ‘개똥벌레’를 힘차게 부르던 그녀의 목소리가 여운이 남는다. ”나는 개똥벌레, 마음을 다 주어도 친구가 없네, 사랑하고 싶지만 마음뿐인걸.” 그녀의 수필집 ‘그대의 명함’이 외로운 사람들에게 빛이 되고, 위안이 되길 바란다. 그녀의 남편도 하루빨리 건강을 되찾아 소설 같은 멋진 사랑의 주인공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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