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무대야말로 연기력의 원천”
“연극무대야말로 연기력의 원천”
  • 황인옥
  • 승인 2019.12.16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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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드라마 ‘벽 속의 요정’으로 대구 찾은 배우 김성녀
작품성 인정받은 15년 장수극
40년 내공 ‘1인 32역’ 찰떡 소화
삶 전반을 관통한 애증의 배역
32명 각각 얼굴 넘나드는 숙제
명예롭기도 했지만 징벌이기도
김성녀
 

극적인 스펙터클함도, 눈이 번쩍 뜨이는 3D 입체 영상도 없는 그야말로 아날로그 뮤지컬모노드라마에 대구 관객들이 잔잔하게 젖어들고 있다. ‘벽 속의 요정’이 지난 1일부터 오는 29일까지 한 달 간의 일정으로 대구에서 판을 펼쳤는데 선전 중이다. 입소문을 듣고 한 달간의 장기공연 중에서 열흘을 넘긴 시점인 지난 11일에 공연장을 찾았다, 한 주의 중간인 수요일이어서 한산할 것이라는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갔고, 객석은 관객들로 북적였다.

아날로그 뮤지컬, 그것도 1인극인 뮤지컬모노드라마를 연말에 한 달 장기공연으로 펼친다는 것은 일종의 도전이다. 특히 지역문화가가 불황인 점을 감안하면 우려마저 낳는다. 그러나 ‘벽 속의 요정’이 일정의 반을 소화한 현재 성적은 ‘선전 중’. 주말에는 입추의 여지없는 만석이며 평일에도 많은 사람들이 공연장을 찾고 있다. 좋은 공연에 사람이 몰린다는 공식이 이번 작품에도 예외없이 통하고 있다.

이번 무대를 책임지고 있는 배우 김성녀도 장기 공연을 결정하기까지 고뇌가 없지 않았던 것 같다. 기자를 만나자 대뜸 “극단 고도 김종성 대표가 한 달 장기 공연을 하자고 했을 때 무리수가 아닐까 염려했다”며 말문을 열었다. 그러면서도 “입소문을 타고 관객들이 찾아와 주셔서 힘이 난다”며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벽 속의 요정’은 일본 작가 후쿠다 요시유키가 실화였던 스페인 내정 당시 프랑코 장군 체제에서 30년 동안 벽 속에 몸을 숨기고 살았던 운둔자의 생애를 각색한 모노드라마인데 김성녀의 남편이자 예술적 동지인 극단 미추의 손진책 예술감독이 김성녀의 무대 인생 30년을 축하하며 우리나라 시대 상황에 맞게 새롭게 번안했다. 수많은 무대를 섭렵했지만 뮤지컬모노드라마의 첫 도전은 그녀 나이 55세때였다. “당시 중앙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었어요. 정년퇴직까지 10년만 하자며 작품을 시작했는데 벌써 15년째 공연을 하고 있네요. 지나고 보니 시간이 정말 빠른 것 같아요.(웃음)”

‘벽 속의 요정’의 시간적인 배경은 50년. 김성녀는 50년이라는 시간을 32인의 얼굴과 총 12곡의 노래로 무대와 객석을 쥐락펴락한다. 작품의 시대배경은 1950년대 말. 행상을 하는 어머니와 살아가는 한 여자아이가 벽 속에서 누군가의 소리를 듣자 요정이라고 굳게 믿고 둘도 없는 친구가 되지만 소녀에서 숙녀로 성장하면서도 천사가 아버지임을 알게 된다.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한 가족이 어떻게 희생되는지를 감동으로 버무려낸다.

무대 위의 김성녀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다섯 살 아이, 요정, 소녀, 여학생, 엄마, 남편, 목사, 건달, 경찰, 영감 등 무려 32역을 변신하고 또 변신했다. 2시간을 변화무쌍한 얼굴로 객석을 들었다 놓았고, 웃겼다 울렸다. 춤과 노래, 뮤지컬과 마당놀이, 연극, 영화 등 그 어떤 장르나 역할도 소화가 가능한 40년 내공을 ‘벽 속의 요정’에 모두 쏟아붓는 듯 했다. “코미디언처럼 단순하게 성대모사처럼 할 수는 없어요. 배역이 바뀌면 순간적으로 그 배역에 빠져들 수 있어야 해요. 커튼콜에 마치 32명이 나와서 인사하는 것처럼 해야 하는데 그게 숙제였어요. 15년을 하고 보니 이제야 나름의 성공을 거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차피 배우는 끊임없이 변신해야 하는 숙명을 가진 직업군인 만큼 모노드라마는 오히려 그 점에서 도전해 볼 만한 장르라는 것.

15년전 초연 공연 이후 작품에 대한 찬사는 끝없이 이어졌다. 2005년 예술계 최고의 영예상인 올해의 예술상과 동아연극상 연기상을 수상하는가 하면 평론가협회 올해의 연극 베스트 3 선정을 비롯해 2006년 월간 ‘한국연극’ 선정 올해의 공연베스트 , 2011년 공연전문가 선정 죽기 전에 봐야할 공연 베스트 10으로 선정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세상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15년을 한 배우가 연기했다면 그 작품에서만큼은 장인이라고 칭할 만 하다. 하지만 그 배우가 김성녀라면 전설이라는 칭호도 가깝지 않다. 연출가 아버지와 국극 배우 어머니 사이에서 끼를 타고 태어난 그녀는 5살부터 무대에 올랐고, 남들이 10년 걸릴 것을 2년 만에 소화할 정도로 작품 해석 능력이 뛰어난 배우다. 그만큼 천의 얼굴을 가진, 믿고 보는 명불허전이다.

연기자에게 무대에서의 외로움은 숙명이다. 하지만 특히 모노드라마는 그 중에서도 끝판왕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무대를 끌고 가야한다. 지난 15년의 외로움이 곰삭아서일까? 공연 직전에 만난 그녀에게서 여유가 넘쳤다. 그러나 그것은 물 위의 백조에 불과했다. 물 밑 백조의 치열함이 그녀의 삶 전반을 관통했다. 그녀가 백 속의 요정이 자신에게는 “애증의 관계였다”고 고백했다.

“제게 ‘벽 속의 요정’은 명예롭기도 했지만 징벌이기도 했어요. 적어도 40~50년의 내공을 가진 배우라야 2시간 동안 대하드라마를 혼자 쌓고 구축할 수 있을 만큼 힘든 공연이죠. 저도 1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꾸준하게 좋은 무대를 선사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어요. 힘들게 연기한 후에 관객들로부터 받는 감동 어린 박수가 저를 지탱한 힘이었죠.”

그녀가 “연기야말로 영원한 아날로그며, 연극무대야말로 연기의 원천”이라며 연극 예찬론을 펼쳤다. 그런 자부심을 가지고 계속에서 연극 무대를 지키고 있다고 했다. 연기 내공 4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연기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는 김성녀. 여제(女帝)의 귀환으로 불리는 그녀의 ‘벽 속의 요정’은 29일까지 봉산문화회관 가온홀에서. 5~6만 원. 문의 1566-7897.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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