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옥이 만난 작가] 조각가 박휘봉(2) 누더기 같은 몸, 텅 빈 눈…‘도시인’은 무엇을 찾고 있나
[서영옥이 만난 작가] 조각가 박휘봉(2) 누더기 같은 몸, 텅 빈 눈…‘도시인’은 무엇을 찾고 있나
  • 황인옥
  • 승인 2020.01.27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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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수업 유일 100점 초등생
공간 지각능력 뛰어난 고교생
독학으로 미술사 익힌 직장인
1982·1983·1989년 3회 걸쳐
대한민국미술대전 입선 성과
대학 졸업 후 영남조각회 결성
오랜 시간 부딪혀 마모된 강돌
수용적 태도 지닌 인간과 동일시
대신 눈 뜨고 세상 보는 힘 지녀
도시인1
박휘봉 작 ‘도시인’
 
박휘봉작-도시인1998년
박휘봉 작 ‘도시인’

작가가 걸어온 삶의 궤적은 현재를 가늠하는 단서로써 중요하다. 기억은 작가의 현재와 그가 일구어온 예술세계의 구성요소이다. 조각가 박휘봉에게도 그렇다. 그는 미술과 관련된 에피소드들을 생생하게 기억해낸다. 국민학생(초등학생)때부터 미술에 남다른 소질을 보였던 박휘봉이 70여 년 전의 일까지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은 아마도 근작과 연관된 일화들이기 때문일 것으로 판단된다. 조각가 박휘봉의 가슴 속에 저장된 기억의 편린을 장면 6으로 요약정리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1940년대는 미술정보가 궁핍하던 시절이다. 어린 박휘봉에게는 문학잡지에 간간히 등장하던 그리스 로마조각을 본 것이 조각과의 첫 인연이었다. 그는 1947년에 서울 청계천초등학교에 입학한다. 당시 을지로 2가 황금동 97번지는 적산가옥이었고 박휘봉의 가족이 거주하는 집이었다. 해방은 됐지만 미술책은 여전히 일본책을 한글로 바꾼 형식을 취할 뿐이었다. 담임 오복순이 미술시간에 책가방과 필통을 그리라고 했다. 단연 박휘봉의 그림이 반에서 으뜸이었다. 선생님이 “전교에서 100점은 너 하나 뿐이야”라고 칭찬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그림을 을지로 2가 97번지 집 벽에 붙여놓고 보다가 6.25 동란 2년 전에 시골(영양)로 이사하며 두고 온 것이 못내 아쉽다. 3학년 때부터는 경북 영양초등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때 신었던 장화 상표인 ‘오복신발’이 박휘봉에게는 우연과 필연의 매개체로 자리 잡은 듯하다. 영양초등학교에서도 그의 그림은 매번 교실 뒤에 붙을 만큼 그림 잘 그리는 아이로 통했다. 장면 1이다.

영양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경북 안동에서 안동고등학교 1년, 강원도 원주고등학교를 2년 다녔다. 중학교 2학년 때 미술선생님에게 배운 작도법이 박휘봉에게는 중요한 단서이자 기억 한 자락이다. 공간 지각력이 남달랐던 박휘봉은 절대감각을 타고났다는 소리를 곧잘 듣곤 했다. 사물의 단면을 보고도 입체로 파악하거나 다시점(多視點)으로 보는 능력을 겸비했던 것이다. 정확한 단서 없이도 사물의 입면도와 평면도에 이어 측면도까지 척척 그려내는 손재주에 사람들은 탄복했다. 이것은 장면 2이다.

1962년부터 박휘봉은 영일 기계중학교에 재직한다. 잡지에 간간이 등장하는 미술작품들을 스크랩하기 시작한 시기이다. 도록 제작이 빈번해지고 미술을 이해할만한 자료가 좀 더 풍부해지자 서양미술사를 체계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책에서 얻은 정보를 통해 시대분류와 작가 구분은 물론 책 제목과 페이지까지 꼼꼼하게 기록·정리한 것은 자발적인 내면다지기에 해당된다. 이때 마련한 1만 여점의 슬라이드를 3장의 CD에 담았다. 미술에 대한 관심은 결국 연구로 이어졌고「19세기 화가들의 작업이 조각사에 미친 영향」이라는 논문까지 쓰기에 이른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발표는 보류했지만 만족할만한 내적성장의 디딤돌이 된 논문이다. 자신만의 예술철학을 단단히 다지는 계기도 됐다. 장면 3이다.

박휘봉은 81년에 영남대학교 조소과 3학년에 편입을 한다. 동급생들이 그를 아저씨라고 부를 정도로 재학생들과는 20살 이상의 나이차이가 난다. “나 때문에 아이들이 혼나기도 했어요. 왜냐하면 내가 너무 열심히 했거든요.” 편입과 동시에 방학은 오롯이 작업에 바쳤다. 81년 여름이었다. 점프하는 자세의 인체 <나부>를 신라미술대전에 출품해서 ‘입선’을 하고 그해 여름 다시 토루소에 넓적한 철판을 댄 작품 <화(和-harmoy)>로 대구시전에서 특선을 한다. 1982년 대구미술대전 ‘금상’에 이어 1984년에는 同공모전에서 ‘대상’이라는 영광을 거머쥔다. 1982년, 1983년, 1989년 3회에 걸쳐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입선을 한 것을 종합해볼 때 박휘봉의 열정은 가늠되고도 남는다. 졸업 후 곧바로 ‘영남조각회(1986~2004)’를 결성해 매년 한 번씩 전시회를 열었다. 그밖에도 경북조각회전(1983~97), 한국조각가협회전(1989~2004), 한국신구상회전(1994~20040, 대구조각가협회전(1999~2004) 등의 단체전에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한다. 장면 4이다.

조각 작품으로 첫 개인전을 열기 전에 박휘봉은 1964년과 1967년 두 차례에 걸쳐 수채화로 개인전을 열었다. 교직에 몸담고 있을 때이며 81년 영남대학교에서 정식으로 조각을 배우기 전이다. 조각 전공으로 학업을 마친 후 박휘봉이 처음으로 조각 작품으로 개인전을 연 것은 1987년(대구 대백문화관)이다. 이후로 그가 꾸준히 고민한 것은 ‘휴머니즘’이다. 1999년부터 더욱 심각하게 고심한 주제이기도 하다. 그의 시선은 늘 사회 구성원들에게로 향했다. 당시 그에게 사회는 하나의 굴레였다. 386세대들이 통감했던 시대상황은 사회 부조리를 경험하고도 입 다물고 침묵해야했던 것이다. 억울함을 당해도 묵묵히 삭혀야 했고 귀는 닫아야 무사했다.

“육체는 누더기고 얼굴은 창백하다. 병자는 아니다. 정면을 향하여 저마다의 얼굴은 무표정하다. 무디어진 표피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스스로가 펼 생각조차 않는다. 너무나 길들여졌다. 꽉 다문 입, 귀는 듣지 않아 오무라들었다. 숨은 막히고 심장도 멎었다. 쾡한 눈 너머로 저 먼 영혼의 하늘에 먹구름이 내리고 이제 영상은 기억이 사라져 버렸다. 허공을 향한 초점은 무엇을 찾고 있는가?” (「도시인」, 박휘봉, 1999년) 장면 5이다.

박휘봉의 위「도시인」은 강돌을 닮았다. 강돌은 수십만 년 전부터 강물에 떠밀려 흘러가다가 서로 부딪히며 마모된다. 조각가 박휘봉은 이런 강돌을 주시하고 사람과 동일시한다. 그가 조각한 강돌에서 부릅뜬 눈은 세상을 살핀다는 의미가 내포되어있다. 로뎅이 만든 <칼레의 시민>이 저항적이라면 박휘봉이 만든 도시인의 모습은 수렴 또는 수용적이다. 예술작품이라기보다 작가가 품은 삶의 철학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장면 6이다. 장면 1, 2, 3, 4, 5, 6은 다른 듯 닮아있다. 모든 기억과 경험들이 그의 현재 작업에 소환된다.

박휘봉은 1985년~1989년에 제작한 <율>시리즈를 신고전주의에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다만 우리는 “나의 신고전주의는 신고전주의적인 것을 현대화 하는 것”이라고 한 그의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92년~1994년 작 <비상飛翔> 연작은 서양의 ‘날개’와는 다른 관점에서 제작됐다. 한국인의 ‘비상’은 날개가 아닌 옷 주름이나 구름 또는 말의 갈기로 표현된다. 이를테면 삼실총, 무용총, 우현리대묘 등 고구려 고분벽화나 신라의 선덕대왕신종(봉덕사 종)과 천마도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다. 바로 박휘봉이 영감을 받은 유물들이며 <비상>에 날개를 낱낱이 새기지 않은 이유이다.

조각가 박휘봉의 다부진 강단은 작가기질 그대로다. 인간의 아픔과 그 내면을 꿰뚫는 통찰력을 지닌 그는 “조각은 입체이며 덩어리로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다. 입체모형을 잘 만든다고 하여 조각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기교가 뛰어나다고 예술가가 되는 것도 아니다.”라고 한다. 오는 3월 달성군청 참꽃갤러리에서 주최하는 3인전을 준비 하느라 분주한 박휘봉은 다가오는 5월에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주최하는 원로작가 초대전에도 참여한다. 연이어 7월엔 봉산문화회관 야외에 설치전을 펼칠 계획이다. 열정만큼의 건강을 응원한다.

서영옥ㆍ미술학 박사 shunna9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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