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페우스 신화와 닮은 운명
제72회 칸 영화제 각본상 수상작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상영관이 많지 않음에도 관객들의 입소문을 통해 개봉 2주 만에 9만 관객을 돌파하며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정혼자에게 보낼 엘로이즈(아델 에넬)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화가인 마리안느(노에미 멜랑)가 저택을 찾으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초상화의 모델이 되기를 거부하는 엘로이즈 때문에 화가가 아닌 산책친구로 가장한 마리안느는 은밀하게 그녀를 지켜보며 초상화를 완성한다. 그렇게 완성된 초상화는 엘로이즈에게 생명력과 존재감이 없다는 평을 받게 되고 마리안느는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스며들듯이 이끌리는 두 사람의 안타깝고 절절한 감정은 섬세한 각본과 뛰어난 영상미, 그리고 탄탄한 연출의 힘으로 퀴어영화라는 거부감보다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으로 관객을 설득하며 다가온다. 끝이 정해져 있는 그들의 사랑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한 권의 책을 통해 운명적인 결말을 예상하게 만든다.
죽은 아내 에우리디케를 잊지못해 저승까지 가서 데리고 오지만 뒤돌아보지 말라는 경고를 무시하는 바람에 결국에는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되는 오르페우스의 이야기는 그들의 사랑과도 닮아있다.
하녀인 소피는 뒤돌아 본 오르페우스를 비난하지만 마리안느는 ‘오르페우스가 뒤돌아봄으로써 연인이 아닌 시인의 삶을 선택한 것’이라고, 엘로이즈는 ‘에우리디케가 뒤돌아보라고 그를 불렀을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는다.
초상화의 완성은 그들의 이별을 의미한다. 저택을 빠져나가는 마리안느를 향해 엘로이즈는 “뒤돌아봐”라는 말로 부른다. 이를 통해 두 사람의 사랑은 오르페우스 신화와 겹쳐지며 끝이 나지만 끝이 나지 않는 관계를 완성하게 된다.
마리안느가 배를 타고 들어갈 때와 초상화를 완성했을 때 존재감 없이 남자배우가 잠깐 등장할 뿐 영화의 대부분은 여성의 이야기만으로 채워진다. 영화 속 여인들 사이에는 계급이나 성별은 없고 사람이 존재할 뿐이다.
배경음악 없이 캔버스 위를 스치는 목탄소리, 물감을 칠하는 붓의 움직임, 그리고 벽난로의 장작타는 소리, 파도소리만으로도 허전함 없이 꽉 채워주던 영화는 엔딩에서 음악을 통해 감정을 폭발시킨다.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을 들으며 숨죽여 오열하는 엘로이즈와 그녀를 멀리서 바라보는 마리안느의 모습은 깊은 여운을 남긴다.
배수경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