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을 고르듯
신발을 고르듯
  • 승인 2020.02.03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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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밥그릇 옆에 국그릇, 숟가락 옆에 젓가락, 종이 옆에 펜, 오른쪽 신발 옆에 왼쪽 신발, 남편 옆에 아내처럼 둘이 하나가 되어 나란히 함께 있는 것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해지는 것들이 있다. 닮은 것들이 최대한 가까이 있는 풍경을 대할 때면 언제나 난 행복감을 느끼곤 한다.

약속한 것도 아닌데 ‘우한 폐렴’(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인해 다들 손 씻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나 역시 오늘 하루만 해도 몇 번이나 손을 씻었는지 헤아리기 어렵다. 지하철이나 마트, 커피전문점 어디를 가도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이젠 더는 낯설지 않다. 불안보다는 대안을, 걱정보다는 안정을 취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한 이때, 마스크를 쓰고 입을 가리고서도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입은 재앙을 불러들이는 문이라고도 한다. ‘말이 고마우면 비지 사러 갔다가 두부 사서 온다.’ 는 속담처럼 말이 가지고 있는 힘이란 참으로 크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기도 하지만 한마디 말로 천 냥 빚을 오히려 지기도 한다. 이럴 때일수록 신발을 고르듯 서로의 불안한 기분을 잘 헤아려 좀 더 신중하게 고른 말을 해 보는 건 어떨까 싶다.

게리 채프먼(Gary Chapman) 박사가 쓴『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라는 책에는 사람마다 각각 다른 사랑의 언어가 있다고 한다. 사랑을 표현하고 전달받는 방법으로 ‘인정하는 말’, ‘함께 하는 시간’, ‘봉사’, ‘선물’, ‘육체적인 접촉’의 5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같은 언어를 서로 주고받듯이 사랑에도 각각의 사랑의 언어로 표현해야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사랑한다고 표현하는데, 상대방은 낯선 외국어나 도무지 알 수 없는 외계어처럼 듣는다면 서로 소통이 가능할까. 사랑한다고 하면서 헤어지는 커플들을 본다. 그들도 그들 방식대로 사랑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각자의 방식이지 공동의 방식은 아니었던 셈이다. 나와 당신만의 언어가 아니라 우리만의 언어로 사랑을 말해야 할 때다.

목회 하는 남동생이 청소년 사역을 할 때 일이라며 들려준 이야기가 떠오른다. 대학교수인 아버지와 가정 상담을 전문으로 하는 어머니를 둔 남들이 보기에는 꽤 괜찮은 집안의 아이가 있었다고 한다. 그 아들은 너무 완벽한 부모와 행복한 환경을 버리고 가출해 버린 것이다. 길거리 친구들과 어울리며, 거기서 만난 자퇴한 여학생과 사귀는 바람에 부모의 큰 근심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아이는 여자 친구가 자신을 따듯한 말로 위로하고 늘 손잡고 같이 걸어 주는 것이 너무 좋았단다. 이 아이가 느끼는 사랑의 언어는 손으로 전하는 ‘접촉’인 것을 부모는 모르고 있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누군가를 만지고 안아 줄 때, 또 격려가 필요하고 위로가 필요할 때마다 따듯한 온기로 포옹해준다면 저수지의 물처럼 충만한 사랑을 느낄 수 있을 성싶다.

‘봉사’를 사랑의 언어로 가진 친구 남편이 있었다. 묵묵히 그저 회사에서도 일, 집에 와서도 일, 오로지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일만 한다고 했다. 열심히 회사 일을 하고, 가정에 돌아와서도 쓰레기를 비우고, 집안일을 도와주는 것이 가족들을 사랑하는 것이라고만 믿더라는 것이다. 나무랄 데 없는 참 자상한 남편이라며 부럽다고 했더니 정작 같이 사는 친구는 속상해했다. 친구의 남편은 그런 그녀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남녀가 데이트할 때도 마찬가지 아닐까. 그냥 같이 있는 것을 ‘함께 한다’라고 생각하는 남자에 비해 반면 여자들에게 있어 ‘함께 한다’라는 진정한 의미는 눈을 맞추고, 상대방의 필요로 인해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는 공감이 일어나야 하는 시간을 뜻한다는 것이다. 시간은 신발을 꼭 닮은 듯 보인다. 신발을 고를 때면 앞코는 넉넉하게 잡고 뒤축은 발에 딱 맞게 골라야 발이 편하듯 앞에서 보면 길고 뒤에서 보면 짧다. 시간을 대하는 자세도 마찬가지 아닐까. 신발 고르듯 언어를 고르며 다가올 일은 길게 보고 지나간 일은 짧게 잊어버렸으면 좋겠다. 지금은 꽤 길어 보이지만 끝날 때가 되면 참 짧게 느껴지던 2월, 그 또한 ‘다 지나간다’라는 말의 힘을 믿는다.

파스빈더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라고 말했지만, 영혼을 잠식당하면서까지 불안에 떨지 말기를 그리고 ‘우한 폐렴’ 더 이상의 감염자 없이 다들 무사히 잘 지나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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