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시인·극작가…그들은 어떻게 노벨문학상을 탔나
역사학자·시인·극작가…그들은 어떻게 노벨문학상을 탔나
  • 정경은
  • 승인 2020.02.12 21:2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구, 노벨상을 품자 - (4) 삶과 업적 살펴보기
독일 역사학자 ‘크리스티안 몸젠’
1880년 서재서 발생한 화재로
필생역작 ‘로마사’ 모두 소실
포기 않고 재출간…1902년 수상
프랑스 시인 ‘프레데리크 미스트랄’
필생사업 ‘오크어 문학 부흥’
1854년 ‘펠리브리지’ 설립
오크어로 수많은 작품 저술
노벨문학상-문학이란
노벨문학상-문학이란. 그림 이대영

◇로마역사 노천탄광에서 시련의 의미를 찾아

1902년 두 번째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독일의 역사학자이며 고전문학자인 크리스티안 몸젠(Christian M. T. Mommsen, 1817~1903)이었다. ‘역사적 저술에서 생존하는 최고 위대한 저술가로서 로마사란 기념비적인 작품을 남긴 공로’로 단독수상자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1817년 11월 30일 독일 가르딩에서 태어나 함부르크로 이사했고, 크리스티아네움 김나지움에 입학해서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배우다가 1837년에 졸업했다. 1838년 킬 대학교에서 법리학을 연구했으며, 1843년에 로마법으로 박사과정을 마쳤다. 이 때 동숙생이었던 테오도르 스토름과 동생 타이코 3인이 공동으로 ‘세 친구의 노래책(Liederbuch dreier Freunde)’시집을 출간했다. 물론 테오도르 스토름은 유명한 시인으로 활약을 했다.

1848년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찾아 ‘고대 로마의 비문(碑文)보존에 대한 연구’로 라이프치히대학교의 교수직에 임명되는 데 디딤돌이 되었고, 그의 일생에 로마역사를 저술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1852년 취리히대학교 로마법 교수직을 받아들여 2년간 보내고, 1854년 브레슬라우대학교 교수가 되어 1854년부터 1856년 필생대작인 ‘로마사’의 원고를 작성했다. 1857년 베를린 과학아카데미 연구교수가 되었다. 이어 독일· 로마 고고학연구소를 설립해 운영했다. 1861년 베를린대학교 로마역사 교수로 강의를 1887년까지 했다. 1859년 네덜란드 왕립과학예술아카데미(Royal Netherlands Academy of Arts and Sciences)의 외국인 회원으로, 1868년 명예로마시민권을, 1870년 미국골동품학회 회원이 되었다.

그러나 필생역작으로 저술해왔던 4권 분량의 ‘로마사’ 원고가 1880년 7월 7일 자택 2층 서재에서 화재가 발생해서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원고뿐만 아니라 영국 캠브리지대학교 트리니티대학 도서관에 빌려왔던 책과 하이델베르크대학교 요르단 교수의 귀중한 원고까지 몽땅 불타고 말았다. 1834년 영국 토머스 칼라일이 ‘프랑스 혁명사(The French Revolution: A History)’를 친구 철학자이며 경제학자인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에게 검토를 부탁했더니, 그의 서재에 뒹굴고 있던 원고뭉치를 내용도 모르는 여자하인이 난로 불쏘시개로 태워버린 적이 있다. 칼라일은 1837년에 3권의 ‘프랑스 혁명사’를 출간하면서 “길을 걷다가 돌부리가 발에 걸리면 약자는 걸림돌로 여기지만 강자는 디딤돌로 생각한다(The block of granite which was an obstacle in the pathway of the weak, became a stepping-stone in the pathway of the strong).”라고 시련의 의미를 되새겼다. 크리스티안 몸젠은 칼라일(Carlyle)의 일화를 회상하면서 보다 위대한 저술을 위한 신의 깊은 뜻으로 여기고 다시 저술을 시작하여 5권의 일생일대역작 ‘로마의 역사’를 출간했고, 1902년에 그로 인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얻었다.

◇자연경관, 원주민 정신 및 전통을 민족문학과 드라마로 승화

1904년 프랑스 시인 프레데리크 미스트랄(1830~1914)은 스페인의 토목기술자, 수학자 및 극작가였던 호세 에이사기레(1832~1916)와 2인 공동수상자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프레데리크 미스트의 수상공적은 ‘독창적인 창작에 있어 자연경관과 원주민 정신을 충실히 반영한 새로운 시적 창작에 진정한 영감을 인정하고 프로방스학자로서의 그의 중요한 업적’이며, 호세 에이사기레는 ‘개인적이고도 원래 방식으로 스페인 드라마의 위대한 전통을 되살려 놓은 수많은 화려한 작곡에 대한 인정’으로 수상의 영예를 얻었다.

먼저 프레데리크 미스트랄은 1830년 9월 8일, 프랑스 쁘호벙스(Fuhoumbush)에서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먹고사는데 걱정이 없어 아비뇽왕립대학(Avignon Royal College)에 다녀 1851년에 법학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1854년에 프로방스와 옥시타니아 언어·문화보존 및 진흥을 위한 5개 지방시인 커뮤니티 ‘펠리브리지’를 설립해 운영하면서 필생사업으로 오크어의 문학전통을 부흥하기로 작심하고 오크어로 많은 작품을 저술했다. 1878년 2권짜리 옥시타이나어(Occitan language)사전을 편찬했다. 미스트란 표기안(Mistralian orthography)이라는 철자법표준을 마련했고, ‘교구의 가족들’ 작품을 출간했다. 1859년 ‘미레유’시집을 출판, 알퐁스 도테(Alphonse Daudet, 1840~1897)와 오랫동안 우정을 나눴던 서간집 ‘직장에서 보낸 편지(Lettres de mon moulin)’에서는 시인 미스트랄(Poet Mistral)이라고 칭송을 했다. 1963년 샤를 구노(Charles Gounod, 1818~1893)는 시를 악보로 옮겨 ‘미레유’를 오페라로 개작해 무대에 올렸다. 이렇게 프로방스와 옥시타니아의 자연환경과 원주민 정신을 문학으로 승화시켜 시적 창작으로 문예부흥을 도모했다.

호세 에이사기레는 1832년 4월19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의사이며 연구소 교수인 아버지로부터 태어나 무르시아(Murcia)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어린 시절에 수학에 열정을 갖고 공부했으며, 14살에 돈을 벌기 위해 항구해안공업학교에 가고자 마드리드로 이사해서 산이스이드로 학습연구소(Second Teaching Institute of San Isidro)에 등록해 배웠다. 1852년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Universidad Complutense de Madrid)에서 공부를 하고, 1854년 토목공학 학사학위를 취득했다. 첫 직장을 얻고자 알메리아(Almeria)와 그라나다(Granada)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1854년 기술학교(Engineering School)에서 수학, 기하학, 미분 및 물리미적분까지 가르치는 교사 겸 비서로 1868년까지 일했다. 1858년부터 1860년까지는 공공예술보조학교(Assistants School of Public Works)의 교수직을 역임했다. 1867년 정치경제학회 회원기관지 잡지(La Revista)를 창간해서 언론플랫폼과 자유무역을 주장했다. 1867년에서 1874년까지 정치에 몸을 담았으며, 1868년 군주제를 전복한 혁명내각(revolutionary cabinet)에 들어가 교육부장관, 공공사업 및 재무장관을 역임했다가 1874년에 부르봉 복원(Bourbon restoration)으로 은퇴했다.

그러나 문학소년 시절에 괴테(1749~1832), 발자크(1799~1850), 호머, 가우스(Carl Friedrich Gauss, 1777~1855) 및 르장드르(Adrien Marie Legendre, 1752~1833)의 작품을 열독했고 작품세계에 빠졌다. 1872년 불혹(不惑)의 40세가 되고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나 60여 편의 희곡작품을 저술했다. 19세기 후반 스페인의 대표극작가로 대두되었다. 대표작품으로는 ‘광인인가? 성인인가?(Olocuraosantidad)’와 ‘위대한 갈레오토(El Gran Galeoto)’가 있다. 83세 고령임에도 왕성한 저술활동을 해 30여 권의 수학·물리학 저서를 썼다. 25년간 필생사업으로 수학물리학백과사전을 집필하며 “마무리하기 전에 죽을 수 없다.”고 할 정도였다. 지금도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엔 그의 명성을 딴 에체가라이 거리(Echegaray Street) 플라멩코 술집이 성업 중이다.

글=정경은 코리아미래연구소 수석연구원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