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과 함께한 독립운동가 조지 새넌 맥큔
민족과 함께한 독립운동가 조지 새넌 맥큔
  • 승인 2020.02.20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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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진
정경진 대구지방보훈청 보훈과
독립운동가라 하면 대부분 국내 인물들을 쉽게 떠올리지만, 당시 우리 민족과 함께한 여러 외국인 독립운동가들이 있다.

국가보훈처에서 선정한 2월의 독립운동가도 조지 새넌 맥큔(한국이름 윤산온)이라는 해외 인물이다. 1873년 12월 미국 펜실베니아 주에서 태어난 선생은 을사늑약을 강요하기 2달전인 1905년 부인과 함께 기독교 선교사로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그는 매우 친한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에 늘 일제 헌병과 경찰의 주목과 감시를 받았다. 일제의 한국 강제병합 바로 직전 해인 1909년 일제 헌병대의 기밀 보고서에서도 합방반대 선교사 명단에 그의 한국이름 윤산온이 포함돼 있을 정도다.

그의 한국과의 인연은 한국어를 배우면서 숭실학교에서 교수하며 시작됐다. 그는 이곳에 있으면서 한국인 학생들의 교육에 열정을 다하며 교과 과정과 교육 시설은 물론 미래를 계획했다.

선생의 한국인 교육에 대한 꿈은 1909년 중학교 과정인 신성학교 교장을 맡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실행된다. 선생은 자신의 모교인 파크대학의 교육제도를 모방해 학비가 없는 학생들도 학비를 벌면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근로사업부를 설치해 철공장, 목공소, 목장, 양잠실을 설치·운영했다. 당시 소년 백낙준이 선생을 찾아가 자신의 사정을 호소하자 학교에서 일하면서 공부할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준 것도 바로 그였다.

그러나 선생의 교육사업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는데 1911년 일제의 조작으로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 독립운동가 105인이 투옥됐던 ‘105인 사건’에 주범으로 연루됐다. 그는 이 사실을 해외 선교부와 언론에 전하여 일제 무단통치의 실상을 세계에 알렸다.

선생은 기독교계 학생들의 3·1운동 참여를 독려하며 일본 경찰에게 쫓기는 학생들을 자신의 집에 피신시키고 보호하기도 했고 일제 군경의 탄압, 만행을 친필로 기록해 캐나다로 여행하는 사람에게 맡겨 캐나다에서 미국 시카고에 있던 컨티넨트 잡지사로 보내 게재하게 했다.

1930년대에 이르러서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으나 그는 기독교의 교리와 양심상 자신이 신사참배를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도 참배시킬 수 없다고 최종 답변함으로써 숭실중학교 교장직과 숭실전문학교 교장직에서 파면당하기도 했다.

선생은 이렇게 1905년 을사늑약에서부터 일제의 한국병탄, 105인사건, 3·1운동, 신사참배 거부운동 등 한국사회와 교회의 중요한 사건마다 현장에서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기록과 자료를 남기고 그 중심에 서서 한국인을 사랑했고 한국인편에 섰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헌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한국의 현실과 독립의지에 대해 공감하고 헌신한 외국인 독립운동가 조지 새넌 맥큔과 같은 이들이 있었기에 우리나라 역사의 방향이 달라지지 않았나 생각해 보며 그가 꿈꾼 대한민국을 기억하고 선생의 헌신에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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