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내다보는 혜안으로 향토 서예계 발전 기여
시대 내다보는 혜안으로 향토 서예계 발전 기여
  • 김영태
  • 승인 2020.03.23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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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헌 김만호의 예술세계를 찾아서
(41) 만년기(晩年期) 6. 1992(85세) 영면(永眠)
단아하되 웅려한 독자 필체
신운 꿈꾸며 심정필정 구현
영호남·국제 교류 높은 평가
대구 언론사 타계 일제 보도
제자들, 스승 교훈 계승 다짐
 
 
소헌김만호선생영결식
대구서예인장(大邱書藝人葬)으로 거행된 소헌 김만호 선생의 영결식 광경. 1992년 3월 9일 봉강연서회 마당에서 행하였다.
 
조문객상여
장지(葬地)인 칠곡 가산(다부동 산98-9)에서 행한 만장(挽丈)행열. 소헌 선생의 제자들과 많은 조문객이 상여를 뒤따랐다.

◇영남 필봉(筆鋒)의 타계, 대구서예인장

평생 ‘심정필정(心正筆正)’의 정신을 구현하고자 노력했던 소헌 선생의 삶은 1992년에 종지부를 찍었다. 서도(書道)의 외길로 살아 온 소헌 선생은 1992년 3월 5일(음 2.2) 새벽 1시반(丑時)에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택에서 영면(永眠)하였다. 부인 박경임(朴瓊姙) 여사와 장남(相大), 차남(榮秀), 4남(榮泰), 며느리(張景善), 조카(相殷)가 임종(臨終)을 하였다. 평화롭고 온화한 모습이었다. 그의 나이 85세였다.

매일신문은 이 날(3.5) 석간에 선생의 서거(逝去)를 아래와 같이 보도하였다.

「대구 원로서예가 김만호씨가 오늘(5일) 새벽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4세. 1908년 10월 19일 경북 의성군 사곡면 오상리에서 태어난 그는 국전에 여러차례 특·입선했으며 봉강연서회와 영호남서예교류전을 주재했다. 대구·서울·부산 등지에서 6회의 개인전을 갖고 ‘소헌김만호서집’을 냈고 대구미술대전의 초대작가·심사위원으로도 활약했으며, 경북문화상을 수상했었다. 발인은 9일 오전10시 대구시 수성구 만촌2동 998의 17 자택. 장지는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2리 앞산. 연락처 755-0404」 (매일신문 1992.3.5.)

다음 날(3.6)에도 매일신문과 영남일보 등 일간 중앙지에도 일제히 보도되었다.

「‘서예(書藝)’보다 ‘서도(書道)’지향. 5일 타계 원로서예가 소헌(素軒) 김만호(金萬湖)씨-.

오랜 투병 끝에 5일 타계한 대구의 원로 서예가 소헌 김만호(85세)는 단아하면서도 웅려하며 속진(俗塵)을 떨구어 낸 서도(書道)로 독자적인 경지를 펴 보였었다. ‘서예’보다는 ‘서도’를 지향했던 그는 ‘신운(神韻)’의 경지를 꿈꾸며 ‘심정필정(心正筆正)’의 정신을 구현한 서예가이기도 했다. 더구나 그는 한학(漢學)이 뒷받침되고 ‘법(法)’으로 들어가서 ‘무법(無法)’으로 나오는 경지에 닿음으로써 후진들에게 서도는 ‘마음으로 그린 그림’이라는 일깨움과 삶의 진리를 깨닫는 인간성 추구가 선행돼야 한다는 교훈을 남기기도 했다. 어린 시절 ‘신동(神童)’으로 불렸던 그는 주경야독으로 한학과 한의수업을 했으며 50고개에 한의원을 경영하면서 국전(國展)에 특·입선하면서 서도의 길을 본격적으로 걸었다. <하 략>」 (매일신문 1992.3.6.)

영남일보의 보도는 다음과 같다.

「5일 타계한 소헌 김만호씨, 향토서예계에 큰 족적을 남긴 서예인-.

1908년 의성군 사곡면 오상리에서 출생한 그는 창랑 김희덕 선생으로부터 붓글씨를 배웠으며 국전을 통해 서예인으로 입문했다. 지난 61년에 후학들과 함께 봉강연서회를 조직, 본격적으로 서예활동을 해온 그는 그동안 5백여명의 제자들을 지도해 향토 서예계 발전에 기여해 왔다. 그는 지역간 문화교류와 국제교류전에도 큰 관심을 보여 ‘영호남서예교류전’과 ‘한·중·일교류전’을 주관하면서 향토 서예계 발전을 위해 힘써왔다. 소헌은 회갑을 맞던해 고혈압이 발병으로 투병 중에도 서예에 전념, 보다 깊이있는 세계를 펼쳐보이는 등 그의 글씨는 만년에 더욱 완숙한 경지를 보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첫 번째 개인전이 이 투병 기간 중에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고 서예인들은 말하고 있다. <하 략>. 오성관기자」 (영남일보 1992.3.6.)

선생의 부음(訃音)에 접하여 장례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장례위원장에 서경보(서예가,영남대교수), 집행위원장에 이성조(대구서예가협회장), 집행위원은 강신태 외 22인이었다. 부고(訃告)는 다음과 같다.

「訃 告

素軒義城金公萬湖先生 以老患 陽三月五日 丑時別世

大邱書藝人葬擧行 玆以公告

嗣子 相大 榮秀 榮植 榮泰 榮俊 相吉

孫 章勳 聖勳 正勳 昌勳

永訣式 3月 9日 午前 10時

場 所 大邱市 壽城區 晩村2洞 998의 17

鳳岡硏書會(755-0404)

葬 地 慶北 漆谷郡 架山面 多富2洞 前山

1992年 3月 5日

葬禮委員長 徐鏡普

執行委員長 李成祚

執 行 委員 姜信泰 高義煥 權赫澤 金大煥 金炳埰 金榮穆 金永勳 金鐘植 都利碩 柳永喜

朴善楨 朴壽錫 朴熙東 蘇孝永 宋錫熙 孫錫琦 沈載完 安永煥 禹相洪 李東圭

李貞培 曺光鎬 玄海鳳 (가나다順)」

◇대구서예인장, 장례위원장에 서경보 영남대 교수

장례는 대구서예인장(大邱書藝人葬)으로 거행되었다. 5일장이었다. 영결식은 3월 9일 만촌동 자택 ‘봉강연서회’ 마당에서 행하였다. 경향 각지의 조문객들이 줄을 이어 애도(哀悼)를 표했다. 장지(葬地)는 미리 매표(埋表)해 두었던 칠곡 다부동 가산(架山)이었다. 장지에서는 문하 제자들과 많은 사람의 만장(挽丈) 행열로 상여를 뒤따랐다.

만장(挽丈) 행열의 만사(輓詞)는 서경보, 이수락, 박선정, 김병무, 우상홍, 오의환, 김대환, 박인목, 김종식, 박준기, 이상국, 박희동, 백락휘, 김주석, 김종철, 송석희, 박혁수, 정 명, 김영훈의 애도(哀悼) 시문(詩文)이었다.

장례위원장 서경보(徐鏡普) 교수의 만사(輓詞)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藝苑叢生問幾何 手提心授德兼多/ 예원총생문기하 수제심수덕겸다

百年事業遺珠在 莫唱哀哀 露歌/ 백년사업유주재 막창애애해로가

壬申仲春初六日 達成 徐鏡普 哭/ 임신중춘 초6일 달성 서경보 곡」

해석하면

“봉강예원의 문하생이 그 얼마였던고, 손으로 끌고 마음으로 가르치니 아울러 덕(德)이 더 많이 쌓였도다. 평생동안 하신 일이 주옥같이 살아 있으니, 슬프고 슬퍼서 해로가( 露歌)조차 부르기 힘들구나. 1992년 3월 6일 달성 서경보 통곡하다”

이완재(李完栽) 영남대 교수는 「…1992년 3월 5일에 소헌 김만호 선생께서 돌아가셨다. 수많은 제자들이 삼베 두건과 삼베 띠를 허리에 두르고 상여를 뒤따랐다. 이른바 사복(嗣服), 스승을 위한 복(服)을 입은 것이다. 이것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니다. 이것이 사심없이 일생을 서도에 몸 바친 소헌 선생에 대한 고귀한 훈장이라 해야 할 것이다」라고 ‘지성감신(至誠感神)의 서도가 소헌 김만호 선생’에서 기술(記述)했다.

다음은 변정환(卞廷煥) 경산대 학장이 ‘한의학회지’에 게재한 ‘고별사(告別辭)’이다.

「소헌 김만호 선생님 영전(靈前)에-

선생님! 온화하게 웃으시며 담소하시던게 엊그저께 같은데 이제 유명(幽明)을 달리 하여 다시는 오지 못할 길을 가셨다니 도무지 믿기지 않습니다. 생자부운기(生者浮雲起)요 사자부운멸(死者浮雲滅)이라더니 이렇게 홀연히 가시옵니까. 제가 비향(鄙鄕)에 모옥(茅屋)을 짓고 선생님께 현액(懸額)을 부탁드릴 때만 하여도 아직 정리할 일들이 많다고 말씀하셨는데… ‘興善書堂(흥선서당)’이란 제액(題額)이 선생님의 마지막 유필(遺筆)이 될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소헌 선생님! 선생님은 약관의 시절부터 망국(亡國)의 한(恨)을 인재양성과 국민건강 증진으로 달래시면서 붓을 들어 글씨를 써 오신 것이 이제 영남의 필봉(筆峯)으로 우뚝히 서셨습니다. 선생님은 불초한 저가 한방종합병원을 처음 개업했을 때 ‘創守兼全(창수겸전)’이라 휘호해 주시면서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 정의(情意)가 큰 힘이 되어 약령의 고장인 대구에 한의학 유일의 대학을 설립하여 이제 종합대학교로 승격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일찍이 영호남서예교류전을 주관하시어 동서 화합과 서예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심은 큰 혜안(慧眼)이었습니다. 망국의 병으로 일컫는 지역 감정이 깊어진 지금에 더욱 선생님의 혜안이 필요하온데 홀연히 가시니 하늘은 가인(佳人)을 그냥 두지 않나 봅니다. 소헌 선생님께서 팔십오 성상(星霜)동안 저희들을 가르치고 일깨워주신 그 말씀들이 후학들에게 생생히 살아나서 선생님의 영생(永生)의 삶을 이루어 낼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가시어도 저희들은 선생님을 보내지 않으렵니다. 선생님은 봉강(鳳岡)의 큰 산으로 늘 함께 할 것입니다. 선생님 부디 편안히 잠드소서.

1992년 3월 9일 경산대학장 변정환(卞廷煥) 곡(哭)」

철웅(李哲雄)스님은 성전암(聖殿庵)에서 49재(四九齋) 제례를 드렸고, 천주교 대구대교구의 김경식(보니파시오)몬시뇰이 영명(領名) ‘아브라함(Abraham)’으로 화세(火洗)를 드리고 하느님의 은총을 기원했다.

김영태 영남대 명예교수(공학박사,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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