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성자 타고르, 無學의 거대한 장벽 무너뜨리다
동양의 성자 타고르, 無學의 거대한 장벽 무너뜨리다
  • 이대영
  • 승인 2020.03.25 21: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구, 노벨상을 품자 (7) 삶과 업적 살펴보기 - 3
독일 희곡작가 게르하르트 하웁트만
정치성 풍자하는 저항문학 지향
1889년 첫 희곡 ‘해뜨기 전’ 연출
독일문학 자유주의운동 서막 열어
탁월하고 다양한 작품성 인정 받아
1912년 노벨문학상 수상 영예
인도의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학교의 억압적인 분위기 못견뎌
12살 때 중퇴하고 히말라야 여행
노벨상-기탄잘리
노벨상을 탄 타고르의 시집 기탄잘리. 그림=이대영

◇학교중퇴란 쳇바퀴 속에서도 철학적 방향만은 잃지 않아

“극적예술의 영역에서 탁월하고 다양한 작품을 인정해” 1912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독일의 희곡작가인 게르하르트 하웁트만(Gerhart Johann Robert Hauptmann, 1862~1946)이 있다.

그는 1862년 11월 15일 프러시아제국(독일) 실레지아 오버잘쯔브룬(Obersalzbrunn, Silesia, Kingdom of Prussia)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나 1868년 6살에 마을학교(village school)에 들어가 배웠고, 1874년 중학교인 브레슬라우 레알슐레(Realschule in Breslau)에 진학했으나 삼촌이 운영하는 농장(Lohnig)에서 일을 도우면서 농사일을 배웠다.

프러시아제국 육군군속시험에 불합격해서 고향 브레슬라우(Breslau)로 옮겨 조각가를 꿈꾸면서 1880년 왕립예술직업학교((Royal Art and Vocational School)에 들어가 로버트 해르텔((Robert Hertel, 1831~1894) 교수의 지도를 받아 ‘자유무대’에 빠졌고, 드라마제작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평생 동지인 요세프 블록(Josef Block)을 만났고 그의 권유에 따라 1882년 예나대학교(University of Jena)에서 청강을 몇 번 하다가 그만뒀다. 1883년부터 1884년까지는 이탈리아에서 방황을 하면서 새로운 삶을 경험했다.

1885년 5월에 배우자를 얻었고, 베를린에 정착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베를린대학(University of Berlin)에서 역사학을 청강했다. 1889년 첫 번째 희곡 ‘해뜨기 전(Vor Sonnenaufgang)’을 자유무대에서 연출함으로서 독일문학의 자유주의운동에 서막을 열었다.

1890년 ‘화해(Das Friedensfest)’와 ‘유령(Geist)’을 발표하고, 1891년 ‘쓸쓸한 사람들(Einsame Menschen)’을 발표했다. 그 작품을 보면 헨리크 요한 입센(Henrik Johan Ibsen, 1828~1906)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최고걸작인 1892년 ‘직조공들(Die Weber)’은 1884년 실레지아(Silesia) 지방의 직조공들의 폭동을 묘사했던 자연주의 연극이었기에 최초에는 정치적 이유로 상연이 금지됐다. 1893년 ‘하넬레의 승천(Hanneles Himmelfahrt)’을 1896년 ‘침종(Abendglocke)’을 상연했다.

그의 작품은 늘 시대상황에 저촉되고 또 정치성을 풍자하는 체제저항문학을 했던 탓일까, 그의 삶은 물론이고 결혼생활마저 순탄하지 않았다. 1904년 알코올중독자의 집안이라는 이유로 아내와 이혼을 했고, 이미 내연관계로 아들까지 낳았던 여배우 마가렛 마슈찰크(Margarete Marschalk)와 재혼했다. 다음해에 다시 이혼을 하고 말았다. 그 사연은 16세의 오스트리아 여배우 이다 오를로프(Ida Orloff)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하넬레의 승천(昇天)’에서 주연을 맡았다. 그는 베를린에서 그녀를 만나 여러 작품에 영감을 받았기에 그녀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예술과 문학의 신 ‘뮤즈(Muse)’라고 그렇게 불렀다.

◇비유럽과 무학(無學)의 거대한 장벽을 무너뜨린 동양의 성자

1912년 영국의 시성(詩聖)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 1865~1939)가 인도의 지인으로부터 인도의 무명시인 원고를 받아들고 “여러 날 들고 다니면서 기차 안에서도 버스 안에서도 읽고 있었다”고 감탄한 라빈드라나트 타고르(Rabindranath Tagore, 1861~1941).

예이츠는 ‘신에게 헌정하는 시(Song Offering)’ 혹은 인도어 ‘기탄잘리(Gitanjali)’에 서문추천사를 썼고, 영국에서 출판할 수 있게 도왔다. 타고르는 191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얻었다. 인도의 민족시인, 음악가 및 화가였다. “영어로 쓴 서양문학의 일부로 시적 사고가 신성하고 정감적이며 아름다운 시어를 자신의 언어로 표현했다”고 노벨문학상 심사위원장이 심사평을 했다.

그는 1861년 5월 7일 대영제국 인도 벵골 캘커타(Calcutta, Bengal Presidency, British India)의 이름 있는 브라만 가문에서 태어났다. 조부는 19세기 대영제국의 동인도회사가 없어지는 과정에 막대한 적부(積富)를 했으며, 부친은 힌두교 개혁에 관심을 갖고 위대한 성자 ‘마하드시(Maharshi)’라는 칭호까지 받았다. 14번째 막내아들로 태어나 사랑을 받지 못했다. 다섯째 형과 형수가 부모를 대신했으며, 7살 때 가문에서는 최고학벌인 초등학교에 들어가 8세에 처음 시를 창작했고, 학교분위기가 억압적이고 무미건조해서 성적이 바닥에 머물렀다.

1872년 12살 때 초등학교를 그만두고 아버지를 따라 히말라야여행을 따라나섰다. 벵골서부 산타니케탄(Santiniketan) 마을에 들렸는데 이곳이 훗날 교육실험의 무대가 됐다. 1875년 돌아왔으나 초등학교를 포기하고, 당시 서구문화에 호의적인 시대사조에 매몰됐다. ‘벵골르네상스’라는 사회문화운동에 주도적 역할을 맡았다. 1878년 영국 유학길에 올라, 1879년 런던대학교(University College London)에 입학했으나 1880년 1년 반에 귀국했다. 아버지 말씀을 받들어 가족재산관리만 하고, 시, 희곡, 단편소설, 비평, 수필 등의 예술작품을 발표하기에 몰두했다.

1883년 22세 때 10세의 평범한 소녀 밥타리(Bbatari)를 아내로 맞이했다. 1890년 수첩과 연필만 들고 혼자서 유럽여행을 떠났다. 그해 귀국하자마자 시집 ‘남자의 도시’를 간행했다. 이를 계기로 문단에 신선한 반향을 일으키고 작가로 인정을 받았다. 1901년 사재를 털어 산티니케탄(Santiniketan)에 학교를 세우고, 1912년 스리니케탄(Suriniketan)에 농업공동체를 설립해 교육과 농업의 개혁을 선도했다. 이렇게 육영사업에 몰두한 이유는 초등학교 졸업장마저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해원 육영사업(解寃育英事業)이었다.

재정난을 당하자 저서판권도 헐값에 출판사에 넘기고 말았다. 고통과 울분을 고스란히 시로 승화시켜 50여 편의 영문번역 시집을 냈는데 이것이 우연한 기회에 해외로 알려지게 됐다. 타고르가 1912년 영국으로 가는 배에서 벵골어 ‘기탄잘리’에 수록된 157편의 일부를 번역했던 것이다. 이 번역본을 화가였던 친구가 당시 유명한 문인들에게 보여줬다. 그 문인이 바로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였다.

영어에 능숙하지 못했던 타고르의 시는 예이츠의 추천사를 얻고 수정 보완돼 103편의 시집 ‘기탄잘리(獻詩, Gitanjali)’라는 이름으로 영국에서 출판되었다. 그는 예상을 뒤집고 하루아침에 인도 대표시인으로 전 세계에 각인됐다. 예이츠는 60번째 시 ‘끝없는 세계의 바닷가에 아이들이 모여들다(On the seashore of endless worlds children meet)’를 인용해 서문 추천사를 마친다.

글=이대영<코리아미래연구소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0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