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 애호가에 묵향 전해지길…망우공원에 ‘예술비’ 건립 추진
서예 애호가에 묵향 전해지길…망우공원에 ‘예술비’ 건립 추진
  • 황인옥
  • 승인 2020.04.02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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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헌 김만호의 예술세계를 찾아서 (42) 영면 이후-1. 1992~1993
제자들, 스승의 예술세계 보존·계승 의지
편집국장이 된 문하생·이태수 시인 등
지역 유지들 지면 통해 애도의 뜻 전해
소헌선생-유묵
신유(辛酉,1981) 74세 때 가을(菊秋)에 휘호한 소헌 선생의 유묵(遺墨) 「강산서색(江山瑞色)」,140.0x40.0cm,1981.

선생의-만사
영결식에 안치된 소헌 선생의 영정(影幀). 뒤 오른편에 소원(韶園) 이수락(李壽洛) 선생의 만사(輓詞)가 걸려있다.

소헌 선생은 1992년 3월 5일에 영면하였다. 차남(榮秀·52세)이 해외에서 귀국한지 얼마되지 않았다. 20여년간의 유학생활을 마감하고 귀국을 하여 대구에 정착한 것이다. 그는 지난 2월에 영남대 문과대학 철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3월 신학기부터 강의를 시작했다. 20대 중반에 유학하여 20여년을 유럽의 독일(서양철학)과 오지리(논리&수리학)에서 공부만 하다가 50세가 넘어서 교수가 되어 귀국을 했으나 기쁨은 잠시, 며칠 후 3월 5일에 소헌 선생은 타계하였다.

4남인 필자(榮泰·45세)는 ‘1990년 국비 해외파견 연구교수’로 선발되어 빈 공과대학 공간조형연구소의 객원교수로 1년간 연구하고 91년 3월 5일에 귀국하였다(1990.2.8~1991.3.5). 일가족 4식구와 함께 보낸 유럽 비엔나 체재는 무척 보람있는 해외경험이었다. 하지만 필자가 귀국(1991.3.5) 1년 후 같은 날(1992.3.5)에 소헌 선생이 운명(運命)하였다. 지금 생각을 해 봐도 효도하지 못한 그 1년 짧은 시공간의 아쉬움이 가슴에 저미어 아파온다.

1992년 11월 21일에는 5남(榮俊·35세)이 대구문화예술회관(관장 김병권)의 기획으로 ‘김영준초청바이얼린독주회’가 문화예술회관 대강당에서 열렸다. 피아노는 향토출신의 피아니스트 김준차(서울챔버앙상블 음악감독)가 협연했다. 가친(家親)을 여윈 슬픔이 채 가라앉지 않은 상태에서도 ‘브람스바이얼린소나타’를 늠름하게 연주하고 청중의 갈채를 받았다.

이즈음 3남 영식(榮植·51세)이 캐나다 밴쿠버로 이민을 떠났다. 그는 고려대 정경대학을 졸업하고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잠시 재직했다가 미도파백화점에 입사하여 중역(상무이사)으로 오래 지냈다.

◇잊을 수 없는 스승

다음은 소헌 선생의 타계(1992) 후 1993년에 문하생이었던 손석기(孫錫琦) 대구일보 편집국장이 학회지 ‘법과 사회’에 기고한 글이다.

「잊을 수 없는 스승, 소헌 김만호 선생님-.

소헌 김만호 선생님의 문하생이 되려고 마음먹고 찾아 뵙게 된 것은 1980년대 초반이었다. 당시 필자는 매일신문사 편집국에 근무하다가 논설실로 전근되면서 시간적으로 정신적으로 여유가 생겨 서예에 본격적인 관심을 가져보려고 노력하던 참이었다.

서예에 처음 입문한 것은 1969년 쯤으로 기억하지만 신문사 편집국에서 일하면서 서예를 공부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노릇이어서 그동안 거의 포기하다시피 하다가 소헌 선생님에게 글씨를 배워보려고 마음 먹고 봉강연서회를 찾았던 것이다. <중 략>.

선생님은 기회 있을 때마다 서예하는 사람의 자세를 일러 주셨다. 첫째는 서예인은 인격이 남달라야 하고 둘째는 인사범절에 빈틈이 없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아무리 테크닉이 우수한 멋진 글씨로 쓴다 해도 인격적으로나 인사범절로나 남의 모범이 되지 않으면 그 글씨는 죽어버린 것과 같다고 강조하셨다. <중 략>.

이 세상에는 서예가도 많고 서예학원을 경영하는 사람도 많다. 그 가운데는 양심적이고 모범적인 인사도 많지만 속세의 나쁜 풍속에 들떠 사회적으로 비난 받는 사람도 흔하다. 최근 서울에서는 서예인들이 공모전을 통해 돈 거래도 했다는 이유로 14명이 구속된 보도를 접했었다. 얼마나 부끄럽고 치사스러운 부조리인가. 이런 사건을 겪고 보면 소헌 선생님의 인품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된다. 선생님은 당신 집에 봉강연서회를 개설해 두셨지만 누구에게도 사례비(謝禮費)를 받았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체본(體本)을 써주시거나 방서(傍書)로 써주셔도 금전으로 환산하여 여수가 이루어 졌다는 소문은 접해 본 적이 없다. 선생님은 작년 84세의 고령으로 작고하셨지만, 만약 오늘 이 세상에 살고 계신다면 서울의 서예인 구속이라는 소식을 들으시고 얼마나 실망하고 낙담하셨겠는가. 예술을 사고 팔고하는 생태가 안타까울 뿐이다. <중 략>.

선생님은 대구만 해도 수백 수천명에 달하는 문하생을 두셨다. 서실을 운영하는 제자들도 수없이 많고 각계각층에서 활약하는 서예인을 많이 배출하셨다. 그러기 때문에 지난해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을 때 문하생들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문상하는 조객들로 만원을 이뤘다.

선생님의 큰 뜻을 이어 받는다는 취지에 따라 봉강연서회원을 중심으로 선생님의 예술비(藝術碑) 건립의 논의가 활발히 일어 이제 그 사업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 서고 있다. 지역 여러 유지들의 협조와 각계 서예인의 노력이 뭉쳐져 대구 망우공원 한자리에 선생님의 공적을 기린 비석이 후학들의 가슴을 철렁이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 자연인 소헌 김만호 선생은 유명(幽冥)을 달리 하셨지만 서예 대가(大家) 소헌 선생은 영원히 우리 대구 시민, 나아가 전국의 서예 애호가들의 가슴에 커다란 감명과 영향으로써 남게 될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손석기(孫錫琦), 대구일보 편집국장>」. 1993

◇타계한 원로 서예가

소헌 선생의 영면(1992) 후 이태수 시인은 ‘대구예술’ 4월호(1993)에 다음과 같이 기고했다.

「타계(他界)한 원로 서예가 소헌(素軒) 김만호(金萬湖)-.

오랜 투병 끝에 1992년 3월 5일 타계한 원로 서예가 소헌 김만호(84) 선생은 단아하면서도 웅려하며 속진(俗塵)을 떨구어낸 서도로 독자적인 경지를 열어 보였다. 서예보다는 서도를 지향했던 그는 신운의 경지를 꿈꾸며 심정필정(心正筆正)의 정신을 구현한 서예가이기도 했다. 더구나 그는 한학이 뒷받침되고 ‘법(法)’으로 들어가서 ‘무법(無法)’으로 나오는 경지에 닿음으로써 후진들에게 서도는 ‘마음으로 그린 그림’이라는 일깨움과 삶의 진리를 개닫는 인간성 추구가 선행돼야 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회갑 무렵 고혈압으로 쓰러져 투병하면서 오히려 더욱 정진, 첫 개인전을 가진 뒤 대구, 서울, 부산 등지에서 여섯 차례의 개인전을 가졌던 그는 7년 전 병상에서 골절 후 거동이 지극히 불편하면서도 붓을 놓지 않는 열정을 보였다. 게다가 최근 병세가 크게 악화되기 전까지 일곱 번째 개인전을 열 계획으로 작품 창작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 략>.

소헌 김만호는 철저하고 깊은 서도의 지론을 갖고 있었다. 그는 늘 아무리 추구해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것이 서도(書道)라고 했다. 글씨를 쓰는 작업을 우리나라에서는 ‘서예(書藝)’로 통용하고 있다. 하지만 ‘서예’는 회화적인 요소를 지닌 조형작업으로 글씨가 가지는 예술성을 중시하는 쪽이지만 ‘서도(書道)’는 예술성은 부차적인 것이고, 순수정신의 계발이 우선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그 때문에 글씨의 예술성을 중시하면서도 그보다는 마음의 밭을 가는 경건함으로 글씨가 지닌 심오한 길을 걸어가는 자세가 선행돼야 한다고 늘 역설해 왔다. 그래서 그는 깨달음에서 출발하는 서도를 지향, 심정필정(心正筆正)의 경지를 꿈꾸었다.

한편 그는 “서도는 신운(神韻)과 연결돼야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신(神)으로서의 격(格)을 이기고 운치(韻致)로서 글줄을 빛나게 하는 것이 신운(神韻)이다. 그러나 신운으로 서도를 한다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늘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서도는 멀고 험한 길이다. 그러나 꾸준하게 나아가면 유현(幽玄)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중 략>.

소헌 김만호의 가족은 대부분 예술의 길을 걷는 ‘예술가족’이다. 그의 미망인 박경임(朴瓊姙)은 서예가이며, 장남 상대(相大)는 바이올리니스트로 계명대 음대 교수이다. 차남 영수(榮秀)는 20여년의 독일 유학을 끝내고 돌아와 영남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3남 영식(榮植)은 캐나다에서 사업가로 활동하고 있다. 4남 영태(榮泰)는 영남대 건축학부 교수로 건축을 전공하면서도 화가(현재 대구일요화가회 회장)를 겸하는 예술가이고, 부인 장경선(張景善)도 서양화가로 활동하고 있다. 5남인 영준(榮俊)은 서울시립대 교수이면서 서울시립교향악단 악장으로 활동하고 있고 국내 유일의 직업실내악단 ‘서울신포니에타’의 음악감독으로 활약하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이면서 지휘자이다. 막내인 6남 상길(相吉)은 한의사로 활약하고 있다. <이태수, 매일신문 문화부장>」. ‘대구예술’ 1993년 4월호에서 발췌 인용.

1993년에는 대통령 직선제가 실시되어 김영삼 후보가 당선되고, 2월 25일에 제14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서 문민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김영태 영남대 명예교수(공학박사,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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