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여겨보지 않던 들꽃·벌레…그 속에서 발견한 삶의 의미
눈여겨보지 않던 들꽃·벌레…그 속에서 발견한 삶의 의미
  • 박승온
  • 승인 2020.04.16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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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온의 민화이야기] 초충도
흰가지 ‘귀한 자식’
복분자 ‘생명력’, 매미 ‘오덕’
방아깨비는 ‘자손 번창’ 상징
한시서 대상 의미 차용했지만
작고 하찮은 생명에 의미 부여
자연 통해 인간의 순리 이해
초충도란 ‘풀과 벌레를 그린 그림’이라는 뜻이다. 풀과 벌레가 그림에서 함께 표현될 때 자연의 생태와 함께 어우러져 생명력과 조화로움을 느끼게 된다. 작은 자연물이기 때문에 화면의 크기도 작은 것이 특징이며 그 화면 위에 생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물과 곤충을 재현하여 작은 미물에 대해서도 관심과 애정을 가졌던 조선 시대 사람들의 자연관과 가치관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초충도의 기원은 12세기 전반에 제작된 고려청자에 초충 문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고려 시대부터 초충도가 그려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밖에 자수에서도 볼 수 있는데 14세기로 추정되는 한국자수박물관 소장의 〈사계분경도四季盆景圖〉(보물 제653호)가 그것이다.
 

사계분경도
<그림1> 보물 제653호 자수 사계분경도(四季盆景圖).

초충도를 그리기 위해서는 생태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자세한 관찰이 요구되고 벌레 특유의 모양, 그것이 내포하는 상징적 의미에 이해가 필요하다.
 

심사임당-초충도 8폭
<그림2> 전 신사임당 <초충도 10폭병> 지본채색 각 34.0x28.3cm. 국립중앙박물관.

위 그림은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진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이 그렸을 것으로 전하는 초충도이다.

신사임당의 초충도는 사실적이고 세심하게 표현되었으며, 자연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우리 생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친근하고 소박한 여러 가지 풀들과 벌, 곤충들을 통해 소중한 생명력과 자연의 친밀감을 보여주고 있다. 신사임당의 초충도는 기법이나 소재 면에서 중국 시경(詩境)의 모시(毛詩)에 나오는 모든 생물 그림의 영향을 받았으나 소재의 표현 방법에 있어서는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자연을 관찰하고 사생하는 독자적인 화법을 만들어냈다. 또한, 우리의 자연환경 속에서 찾아낸 소재들을 우리의 미감으로 표현했으며 진경산수의 대표적 화가인 정선이나, 심사정, 강세황, 김홍도로 그 초충도의 계보가 이어지고 있다.

신사임당은 초충도에서 자식의 건강과 번창, 그리고 그 성공을 의미하는 꽃과 벌레들로 화면을 구성하여 어미니로서의 소망과 사랑을 담은 그림이라 하겠다. 자 이제 초충도 속으로 한 발 더 들어가 보자.
 

초충도-가지
<그림3> 전 신사임당 초충도 지본 채색 33,2 x 28.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초충도 8폭 중 가지가 있는 그림이다.

가지 중에 흰 가지가 보이지요?

필자는 처음에 이 그림에 나오는 가지가 아직 덜 익은 것이라 생각했는데 중국 한시(漢詩)에 “백은가”라고 불리며 흰색 가지가 있습니다. 귀한 자식을 의미한다. 실제로 흰색 가지는 존재한다.

바닥에 넝쿨을 치고 있는 복분자나 저 멀리 지평선처럼 그려져 있는 쇠뜨기 풀은 강한 생명력을 나타내고 있다.

앗차! 방아깨비를 빠뜨릴 뻔했네. 요 녀석 꼬리가 빨갛다. 곧 산란을 할 모양인가보다. 시경(詩境)에 방아깨비는 일생 구십구자(九十九子)라 하여 한 번에 99자(子)를 놓는다고 했는데 역시 자손 번창을 의미한다.

이렇듯 초충도는 중국의 한시(漢詩)나 시경(詩境)에 등장하는 풀과 벌레가 내포하는 의미와 상징을 그림으로 표현한 부분이 많다.

그 대표적인 예를 시 한수로 읽어보자.

매미 소리에 붙이는 글 (명선부 鳴蟬賦) - 구양수(歐陽脩)

여기에 한 물건 있어 나무 끝에서 우는데 (爰有一物鳴于樹顚)/ 맑은 바람 끌어들여 긴 휘파람 불기도 하고 (引淸風以長嘯)/ 가는 가지 끌어안고 긴 한숨 짓기도 하네 (抱纖柯而永歎)

맴맴 우는 소리는 피리 소리와 다르고 (??非管)/ 맑은 소리는 현악기 소리와 같네 (??若絃)/ 찢어지는 소리로 부르다 다시 흐느끼고 (裂方號而復咽)/ 처량하게 끊어질 듯하다 다시 이어지네 (凄欲斷而還連)/ 외로운 운율 토하고 있어 음률 가늠하기 힘들지만 (吐孤韻以難律)/ 오음의 자연스러움 품고 있네 (含五音之自然)/ 나는 그것이 어떤 물건인지 알지 못하거니 (吾不知其何物)/ 그 이름이 매미라네 (其名曰蟬)

이 시의 배경은 가우(嘉祐) 원년(1056), 중국 송나라 인종(仁宗) 때의 일이었다.

“온 백성이 하늘을 원망할 정도로 심한 비가 내려 황제는 구양수(歐陽脩·1007~1072)에게 예천궁에서 제사를 드려 하늘을 달래도록 명했다. 구양수는 엄숙한 사당에서 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냈다. 행여 삿됨이 끼어들지 못하도록 생각을 맑게 하고 마음을 깨끗이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막무가내로 쏟아지던 아침 비가 갑자기 멎었다. 바람마저 멈추더니 구름이 걷히고 푸른 하늘이 드러났다. 멀리서 간간이 우레소리의 여운만이 들릴 뿐 맑은 대기 속으로 햇빛이 쏟아졌다. 할 일을 마친 구양수는 편안하게 풀밭에 앉았다.

무심한 눈길로 빈 뜰을 바라보니 풀밭 사이에 고목 몇 그루가 서 있었다. 그때 발견했다. 나무 끝에서 울어대는 매미 한 마리를. 오랫동안 풀밭에 앉아 매미 울음소리를 듣던 구양수는 느낀 바가 있어 부(賦)를 지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매미 소리에 붙이는 글’, ‘명선부(鳴蟬賦)’이다.

구양수의 ‘명선부’는 매미 한 마리의 울음소리를 통해 심원한 예술론으로 확장해 나가는 시인의 집중력이 표현된 놀라운 작품이다. 명선부에 취한 화가들은 너나없이 매미를 그렸다. 조선의 화가들도 그러했다.
 

정선-송림한선
<그림4> 겸재(謙齋) 정선 ‘송림한선’ 지본담채, 45×23.1㎝, 간송미술관.

정선의 매미 그림은 매우 단순하다. 왼쪽 상단에서 대각선으로 가로지른 소나무 가지에 매미가 붙어있다. 매미는 하늘 쪽을 향해 있는데 나뭇가지는 땅 쪽으로 뻗어 있어 그림 속에 긴장감이 감돈다. 만약 매미가 나뭇가지와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면 그림의 기운이 흘러내린 듯 맥이 빠졌을 것이다. 이 그림의 매력은 또 있다. 대부분의 화가가 나무의 몸통을 넓게 그리고 넓은 몸통에 작은 매미가 붙어있는 형식으로 구도를 잡는다.

실제로 우리가 길을 가다 시끄럽게 울어대는 매미 소리를 쫓아 나무를 쳐다봐도 매미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매미가 보호색을 띠고 있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만큼 매미가 나무에 비해 몸이 작아 존재감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선은 소나무 가지의 연장선처럼 매미를 그렸다. 매미와 나뭇가지가 만나는 부분에서는 붓질이 끊겼다. 마치 두 개의 나뭇가지가 매미를 매개로 해서 이어진 것 같다. 큰 나무의 몸통에 붙은 매미는 매미가 날아가 버려도 아무런 변화가 없지만, 이 그림 속에서는 매미가 자리를 뜨면 두 개의 나뭇가지 연결고리가 끊어지게 되어 있다.

매미를 보며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느껴지는 이유다. 소나무 가지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텅 빈 공간으로 남겨둔 것도 비가 그친 뒤 청아한 기운을 전해준다.

그림 속의 매미는 단순히 감상을 위한 매미가 아니다.

매미가 지닌 ‘오덕(五德)’을 실천하며 살겠다는 다짐이자 맹세였다. 진(晉)나라 때의 시인 육운(陸雲)이 매미를 일컬어 ‘문(文)·청(淸)·염(廉)·검(儉)·신(信)’을 지닌 곤충이라 칭송하였는데 오덕은 군자가 갖추어야 할 도리를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초충도는 자연을 그대로 옮겨 그린 사생화가 아니라 자연에 빗대어 삶의 철학을 담은 철학책이자 사상서이다. 미미한 곤충 한 마리에도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그 뜻을 되새겨 보려 했던 옛사람들의 삶의 자세가 얼마나 숭고하고 겸허한지를 매미 그림 한 장이 알려 준다. 매미 한 마리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했나? 정선은 매미에 너무 반해 버렸나 보다.
 

장영아-초충도
<그림5> 장영아(사단법인 한국현대민화협회 민화강사) 초충도 2019년 작 지본 채색 137 x50cm.

벌레 한 마리 한 마리에 위치와 포즈를 정해 주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좋은 뜻과 상징을 부여하고 시공을 초월하여 어디든 자리 잡은 그곳이 원래 그 자리였던 것처럼 증명사진이라도 한 장 남겨야겠다. 그들의 의미가 잊혀 지지 않도록 !

예술가들의 눈과 마음은 아주 작은 풀벌레를 그린 초충도에서도 즐거움을 얻고 천국의 영화로움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대자연뿐 아니라 그 안에 살고 있는 미물까지도 자세히 관찰하고 그 생태를 그리면서 인생의 멋과 맛을 음미하기도 한다.

한 송이의 들꽃과 한 마리의 나비를 통하여 대자연의 신비로움과 창조주의 무한한 조화를 깨닫기도 한다. 그래서 외사조화(外師造化):자연만물의 온갖 조화를 스승으로 삼는 일이라는 말도 있다.

초충화법의 대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풀벌레를 그리려면 그 날고 번뜩이고 울고 뛰는 상태가 살려져야 한다. 풀벌레의 형태는 대소 장단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 빛깔도 때에 따라 변화하게 마련이다. 초목이 무성할 때는 벌레의 빛깔도 초록색으로, 초목이 단풍이 들 때는 벌레의 빛깔도 칙칙하게 그려야 한다.

풀벌레는 대개 점을 찍어 자세히 그리면서도 정신이 먼저 붓끝에 나타나 있어 보이게 하여야 한다. 모든 풀벌레는 모두 머리를 먼저 그리지만 나비만은 날개를 먼저 그린다. 또 꽃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나비가 있어야 하며, 그래야 꽃이 더 아름답게 빛나는 것이다. 사마귀는 작은 벌레이지만 위엄이 있도록 그려야 한다.

따라서 풀벌레는 아주 작은 미물에 지나지 않지만 그 형상과 정신이 충분히 표현되어 핍진(逼眞): 실문과 아주 비슷함함을 느끼게 해야 한다. 우리 나라에서 초충도를 제일 잘 그렸다고 평가되고 있는 신사임당(申師任堂)의 초충도를 보아도 풀벌레는 어떻게 그려야 하는가를 잘 알 수 있다.

<박승온ㆍ사단법인 한국현대민화협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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