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옥이 만난 작가] 故 극재 정점식(4) 구상·추상 오가며 전통 보존과 변형 자유자재 구사
[서영옥이 만난 작가] 故 극재 정점식(4) 구상·추상 오가며 전통 보존과 변형 자유자재 구사
  • 서영옥
  • 승인 2020.04.20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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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김환기 등 특정 도상으로 정체성 붙든 작가도 있었지만
저채도 색감·거친 필력으로 작품의 ‘한국적 분위기 구현’ 성공
고인돌1986-90-75㎝
정점식 작 ‘고인돌’ 1986.
 
필적-1989
정점식 작 ‘필적’(1989)

미술작품은 전사물이 아니기에 외양을 디테일하게 기록할 의무는 없다. 일일이 장황하게 사실만을 늘어놓을 필요도 없는 미술은 유기체이지만 정신의 산물이다.

조형예술에서 창작은 감각적 요소들을 기계적으로 기록한다기보다 실재를 창의적으로 표현한다. 창작하는 시각은 사물을 상상적이면서도 발명적이고 기민하게 파악한다. 루돌프 아른하임은 “시지각(視知覺)은 단순한 수동적 접수 작용이 아니며 창작은 정신의 구현과정에서 나타난다. … 모든 지각(知覺)은 사고(思考)이고 모든 이지(理智)는 직관(直觀)이며 모든 관찰(觀察)은 발명이다.”라고 했다.

이와 같은 조형예술창작에 기반하여 작업한 극재 정점식(克哉 鄭點植 1917~2009) 선생(이하 극재)은 모든 사물에는 겉모습과 그 속에 담긴 내용이 있다고 한다. 특히 예술에서 내용과 형식은 표리일체(表裏一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극재의 신념이다. 내용과 형식은 미적 대상으로서 사물을 이루고 있는 외적, 내적 체계를 이르는 말이다. 즉, 사물의 표면적 존재 방식과 현상 그리고 그러한 외적인 표현 매체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극재는 이러한 내용과 형식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고 분리할 수도 없다고 한다. 그러나 ‘겉과 속이 다르다’라는 말이 있듯이 불순한 의도로 기만을 꾸미는 경우를 목격하는데, 예술작품은 물론 인간의 인격이나 예술행위에서 이따금씩 그것과 마주하게 된다고 한다. 극재는 ‘전통문화의 계승’에서도 내용과 형식의 표리일체를 강조한다.

“오늘날 우리들은 전통문화의 계승이라는 과제 앞에서 여러 가지 진통을 겪고 있다. 우리들의 문화유산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정신을 오늘날의 감각에 호소할 수 있는 감각적 형식으로 갖추는 일이기 때문이다. 전통문화를 조급하게 설 건드리면 그 원형이 손상되어 전시적인 저속한 효과만 남게 될 것이다. 전통서화의 경우 서화를 떠받치고 있는 정신적인 기운이 교묘한 형식만으로 대치된다면 타락의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극재는 무엇보다 전통의 정신적 원형을 잘 보존하면서 그 원형에서 시대적인 것을 조명하여 비춰내는 일이 중요하다고 했다.

“오늘날과 같은 단절의 시대에는 더더욱 전통문화가 원형 그대로 이어지기 어렵다. 생활양식이 바뀌고 문화적인 생리가 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의 것을 점진적으로 우리 몸에 적응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조급한 나머지 억지로 꾸미고 과장을 한다면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엉뚱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현실과 허상에서 극재가 한 말이다.

극재는 전통문화의 계승을 다음과 같은 부연설명으로 요약 정리한다. “정선아리랑이든가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과 같은 민요는 긴 세월동안 한 형식 그대로만 이어져온 것이 아니라 지역과 때에 따라서 각기 다른 가락으로 다양하게 변형되어 왔지만 본래의 뜻과 내용은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다. 석굴암과 피라미드, 파르테논과 같은 유물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것들은 역사의 거친 물결 속에서도 태연하게 남아있다. 이유는 우리들이 필요로 하고 자랑스럽게 여기기 때문에 생명을 잃지 않고 살아남은 것이다.” 이 밖에도 극재는 지방문화가 민속문화처럼 취급되는 것에 대한 기우를 다음과 같이 드러냈다.

“며칠 전 문화공보부장관의 새해 시정방침발표에서 지방문화육성에 관한 과감한 발표가 있었다. 그것은 우리 지방민들이 절실히 바라고 있던 쾌사이다. 그러나 이 지방문화라는 일반적인 용어에서 어떤 기우(杞憂)를 느낀다. 이때까지의 지방적인 문화행사의 동태(動態)는 민속적인 것에 크게 치우쳤다. 오늘날과 같은 넓고 빠른 정보망 속에서 지방문화라는 말에 어떤 저항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그것이 민속문화라는 뜻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지방문화라는 것은 한국문화라는 대단원 속에 혼유되어있는 것이지 한 특수한 영역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위에 옮겨놓은 문단들은 극재의 두 번째 에세이집 ‘現實과 虛像’에 수록되어있는 내용이다. 모두 극재의 생각과 주장이 선명하게 담겨있다. 극재는 글에서 자신의 작업과 연관된 소재나 주제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텍스트 곳곳에서 묻어나는 예술관을 숨길 수 없다. 그의 예술관이 드러나는 대목을 정리하면 ‘내용과 형식의 일치’, ‘전통문화의 유연한 계승’, ‘민속문화로 치부된 지방문화에 대한 기우’로 축약할 수 있다. 이 세 가지는 극재의 관심사이며 극재의 작업세계를 관통하는 예술정신이다.

90년대 초 어느 날 극재와 함께 대문화예술회관 전시실에서 모 작가의 작품을 관람한 적이 있다. 당시 전시장에는 대구의 모 대학교 교수이기도 한 작가의 작품전이 열리고 있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그 작가의 작품은 전시장 높은 벽면을 가득 메울 만큼 긴 천에 프린트와 페인팅이 믹스된 형식을 취했다. 오방색 사이로 간간이 삼족오와 고구려벽화에서 차용한 수렵도가 눈에 띄던 그림이었다. 그 앞에서 극재는 “삼족오나 수렵도와 같은 역사적인 이미지를 차용했다고 해서 민족성을 표현한다고 하긴 어렵다. 형상의 차용이 내용 전체를 대체할 순 없다.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작가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떤 노력을 했는가도 중요한데 그것은 구체적인 형상 너머의 묘한 기운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고 하던 말이 생생하다. 작가가 특정 이미지를 삽입하거나 특정 재료를 사용한다고 해서 얼이나 정신을 대변한다는 생각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내용과 형식이 일치를 이루기 위해 작가가 취해야할 자세를 꼬집던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다음은 극재의 ‘전통문화 계승’에 관한 소견이다. 극재는 평소에 주체성과 정체성의 중요함을 강조했다. 이것은 예술과 삶에 두루 해당되며 우리 것을 보존하는 태도에 대한 점검이기도 하다. 박수근은 그의 그림에 한복 입은 아낙들을 끌어들였다. 이중섭은 소를, 김환기는 달항아리와 같은 도상을 핵심적인 모티브로 사용했다. 이들은 한국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모티브를 통해 자국민의 주체성과 정체성을 붙잡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오갔던 극재는 이중섭이나 박수근, 김환기처럼 특정한 모티브에만 천착하지 않았다. 극재의 주체성에 대한 몰입도는 이들 화가들에게 뒤지지 않았지만 극재는 그들과 다르게 전체적인 뉘앙스(또는 느낌)에 몰입했다. 극재에게는 낡은 담벼락이나 고대유적지에서 느껴지는 세월의 흔적과 같은 저채도의 색감이나 거칠면서도 빠른 필력이 이것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수단이었다.

극재는 말한다. “반드시 전통적이거나 새롭고 급진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논리는 있을 수가 없다. 그것은 우리들의 감성이 선택하고 결정할 문제이다. 우리들의 다양의 토양 속에서 새로운 창조물을 빚어내야 하며 전통유물(傳統遺物)의 원형을 조심스럽게 보존하면서 한편으로는 한국문화의 일환으로서의 중앙과 지방의 구별이 없는 일체감을 주는 문화의 육성책을 바란다.”(1985년, 현실과 허상)고.

기계적인 기록이 아닌 실재를 창의적으로 표현한 화가 극재 정점식은 매번 변형을 시도했다. 그것은 ‘내용과 일식의 일치’를 유지하는 일이었다.

서영옥ㆍ미술학 박사 shunna9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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