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행간을 읽다
봄, 행간을 읽다
  • 승인 2020.04.27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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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눈에 띄게 해가 길어졌다. 달력을 보니 어느새 4월이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평소엔 잘 보이지 않던 앞산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 책의 날,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주문한 책인가 해서 나가보니 집배원 아저씨다. 코로나 19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시민들의 생활 안정을 위한 ‘긴급 생계자금’이 든 등기를 배달 중이라며 봉투 하나를 내민다.

일반우편물을 돌리기에도 바쁜데 생계자금부터 우선으로 돌리라고 하니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다며 코로나19보다 더 두려운 게 과로사라며 불편한 속내를 마스크 안으로 끝내 쏟아내고 만다. 괜스레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이 편지를 받아든 손이 갈피를 잡지 못해 난감했다. 봉투 안에는 정액형 선불카드 50만 원과 초과분에 대한 온누리 상품권이 들어 있었다. 카드는 7월 말까지, 온누리 상품권은 기재된 유효기간까지 사용을 완료해야 한다. 그때까지 사용하지 않은 금액은 다시 대구시로 환수된다고 적혀 있었다. ‘힘내라 대구’와 함께.

조울병을 앓았던 미국의 시인 로버트 로웰의 말이 떠올랐다. “터널의 끝에 불빛이 보이면 그것은 햇빛이 아니라 다가오는 기차의 불빛입니다.” 또한 “터널 멀리 보이는 한 줄기 빛이 햇볕인지 다가오는 기차의 불빛인지 분간할 능력은 없다. 그러나 끝내 빛의 정체를 확인할 수 없더라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빛이 거기에 있음으로 주춤주춤하면서도 용기를 잃지 않았다고 흔들리면서도 걸어갔다고 그만큼 자신을 스스로 사랑했다”라고 말하던 이주현 작가의 에세이집 ‘삐삐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 중의 한 구절과 함께.

지금 우리의 마음은 ‘조’와 ‘울’ 중 어떤 것에 더 기울어 있을까. 이 두 감정 모두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겠지만 어느 한쪽으로도 오래 침잠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봉투 속 카드와 상품권을 방바닥에 풀어 놓고 어떻게 의미 있게 써야 할지를 생각하고 있는데 공지 문자가 떴다. “코로나 19를 뚫고 드디어 개강하였습니다”라며 문학관에서 온 것과 “코로나 19 확산이 장기화함에 따라 1학기 수업이 폐강하게 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2학기(9월)에 좀 더 안정된 마음으로 개강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는 평생교육원에서 보낸 것이었다. 그때 느꼈다. ‘미루다’라는 동사가 품고 있는 따뜻한 온기를. 올봄에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한 일들이 취소되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미루었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내년 봄이 그려지는 것만 같아.

힘이 들 땐 조금씩 미루면서 가보는 것도 괜찮다 싶다. 즐거운 일들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멀리서 기다리는 중이라 여겼다. 취소하면 그걸로 끝이지만 미루면 기회가 아직 남아 있다는 증거가 되니까.

옛말에 ‘없어서 비단 치마’란 속담이 있다. 넉넉해서 좋은 것을 쓰는 게 아니라 다른 것이 없기 때문에 귀중한 물건이지만 할 수 없이 쓰게 되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코로나 19로 인해 ‘집콕’ 여행을 하며 예전보다 몇 배나 많은 시집을 읽고 쓰고 필사를 했다. 그럴 때마다 행과 행 사이 간격이 넓은 시집을 보고 있으면 사회적 거리두기처럼 행간을 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시집이 가진 행간 넉넉한 공간이 요즘 들어 더 마음을 끈다. “그 간격만큼 무언가 깊고 그윽한 생각이 스며들었겠지” 아니면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그런 넓이나 간격이 아니었을까? 새삼스레 돌다리 두드리며 건너듯 걸어온 길 되짚어 보기도 한다. 시집에서 발견한 그 간격처럼 내 마음에도 마찬가지로 띄엄띄엄한 간격을 만들어 주고 싶다. 그 사이로 잘 발효된 생각이 스며들어서 사람들 사이에 안전거리는 지키면서도 심정적인 거리는 더 가까워지는 날을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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