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우기·자격루·철갑선…조선 세종시대, 과학이 꽃 피다
측우기·자격루·철갑선…조선 세종시대, 과학이 꽃 피다
  • 정경은
  • 승인 2020.04.29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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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노벨상을 품다 - (12) 한국 물리학의 역사
세종 재위 기간 ‘과학입국 정책’
세계적 중요 업적 많이 남겨
신기전·금속활자 등 29건 등재
오늘날 물리학은 1900년대 시작
주요 인물 최규남·박철재 등 꼽혀
최, 1932년 서울대 물리학과 창립
박, 한국물리학회 창립에 큰 공헌
1994년 포항가속기 연구소 건설
노벨상-한국위상
물리학에서 한국위상이 높았던 시기는 조선 세종대왕 시대라고 할수 있다.

◇ 볼펜 실험실과 노천 금광은 언제, 어디든지

일반적으로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라고 하면 세계적 명문대학교 혹은 유수 연구소에서 연구하는 박사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수상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판이하다. 공무원 신분으로 수상한 사람도 3명이나 된다. 1920년 프랑스의 국제도량형국 공무원 샤를 에두아르 기욤 (1861~1938), 1921년 독일 특허청 공무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과 1961년 미국 도량형국 공무원 로버트 호프스태너(1915~1975)가 있다. 물리학이라고 해서 반드시 실험실에서만 연구·분석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 대부분의 이론물리학은 컴퓨터와 볼펜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다.

1965년 노벨물리학 수상자인 하버드대학 교수 줄리언 슈윙거(1918~1994)는 별명이 ‘볼펜 실험실(ballpoint-pen laboratory)’이라고 한다. 1998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오스트리아 출신 이론물리학자 월터 콘(1923~2016)도 그의 제자였으며 스승에게 “그분의 실험실은 볼펜이지요.”라고 말했다. 그의 볼펜 실험실에서 상대적으로 불변하는 섭동 이론(perturbation theory)인 양자전기역학(QED, quantum electrodynamics)이 탄생했다. 따지고 보면 실험을 통해서 입증되지 않았던 만유인력에서 상대성이론까지 대부분의 물리학 이론은 모두가 볼펜 실험실의 결과물인 셈이다.

간단하게 독서를 예로 설명하면, 글자만 읽고 뜻은 모르는 문맹 독서(Illiteracy reading)가 아닌, i) 한 주제에 대해 여러 종류의 서적을 비교 분석하면서 읽는 비교 독서(comparative reading), ii) 행간을 읽어내고, 배후를 뒤집어보는 탐색 독서(black reading), iii) 한 주제에 대해 다양한 관점과 시점에서 읽는 3차원 입체적 독서(3-dimensional reading)와 형이상학적 독서(metaphysical reading)가 있다. 노벨상에 도전하는 속칭 볼펜 실험실에서는 형이상학적 독서(meta-reading) 즉 메타분석(meta analysis)이 아니고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물론 이와 같은 독서는 볼펜 실험실이 아니더라도 지식의 노천 금광인 도서관이나 미래 학문의 씨앗 보관소인 박물관에서도 가능한 독서이고 또한 연구(분석)다. 그래서 노벨상 수상자는 실험실에서만 나오지 않았다. 유명 대학교 출신 박사가 아니더라도 신문사 과학부 기자, 공직자 및 제조업 직공들까지 수상했다. 이와 맥락을 같이하는 실존주의 철학자, 심리학자 및 교육혁명가였던 존 듀이(1859~1952)는 “대학이 아닌 도서관에서 자기주도 학습을 한다면 7배 이상의 지식을 습득할 수 있다”라고 했다.

◇ 통시적 관점(chronical viewpoint)에서 한국 물리학의 위상

옛 동양에서는 우주를 옥식기(宇)나 대접(宙)과 같은 밥그릇을 덮개로 덮은 모양으로 생각했고, 하늘과 땅은 동서남북으로 모서리가 난 바둑판에 둥그런 바둑통을 연상해서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서리진(天圓地方)’ 우주 모형을 디자인했다. 대표적으로 중국 북경의 사직단, 신라 첨성대, 우리나라의 환구단 등이 천원지방(天圓地方)의 개념으로 설계됐다. 공자 이후 주역의 “하늘의 운행은 온전하다(天行健)”는 기반에서 출발해 온갖 사물의 격물 취지(格物致知)를 규명하는 걸 사물이치(事物理致)라고 했으며, 이런 학문을 물리학(物理學, physics)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의 물리학이 세계를 이끌었던 때는 조선 세종 시대로 과학입국 정책 덕분이었다. 1983년 일본 도쿄대학 연구진이 세계 과학기술을 통시적으로 분석해 발간한 과학사·기술사 사전에 의거해 1400년부터 1450년까지 세계 과학기술의 중요 업적으로 등재된 건수를 보면, 중국 5건, 일본 0건, 동아시아 외 전체 지역에서 28건이 있는데 유독 조선만이 29건으로 가장 많았다. 그 기간은 세종대왕(世宗大王) 재위기 1418년부터 1450년과 일치했고, 등재된 발명품으로는 측우기, 자격루, 금속활자, 신기전, 칠정산 내외편, 대·소간의 등이다. 당시 군사력에서도 조선은 철갑선, 신기전 등의 세계 최첨단 무기로 무장한 최강대국이었다. 이 모두가 오늘날로 보면 노벨물리학상 수상 대상에 맞먹는 위대한 업적이었다. 사실, 오늘날 물리학은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시작됐다. 1938년 서울대학교의 전신인 경성제국대학에 물리학과 설치, 1950년대 말 박사학위 수여, 1970년대 후반부터 신학위제도를 도입했다.

초창기 물리학에 기여한 자로는 최규남(1898~1992), 박철재(1905∼1970)와 권영대(1908∼1985)를 손꼽을 수 있다. 최규남은 1926년 연희전문(數物科)을 나와 1932년 미국 미시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서울대 물리학과를 창립했다. 박철재는 1930년 연희전문(數物科)을 나와 일본 교도 대학에서 ‘X선 회절법을 이용한 고분자의 구조 연구’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1945년 서울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한국물리학회 창립에 공헌했다. 1970년에 이르러 비로소 학회 활동이 활성화돼 1971년 한국 과학원 설립, 1976년 한국 과학 재단이 설립됐다. 1980년대 학술회의와 논문 발표를 시작, 1982년 서울 국제반도체 심포지엄, 1985년 제14차 국제회의 개최, 1990년 중국 연변대학 남북 물리학자의 현대물리학 학술토론회 등이 있었다. 1994년 12월 포항 가속기 연구소(Pohang Accelerator Laboratory) 건설로 물리학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듯했으나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병아리처럼 종종걸음만 하고 있다.

한편 국민들의 마음속에 깊이 살아있는 분은 천재 물리학자 이휘소(李輝昭, Benjamin W Lee, 1935~1977)다. 그는 1960년 25세 때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K 이온 중간자와 핵자상관현상의 이중분산 표식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1993년 이휘소 박사를 기념하는 심포지엄 정도만 있었을 뿐인데, 국민들 마음속에 위대한 물리학자로 남아있는 건, 1993년 공석하(1941~2011)의 ‘소설 이휘소(李輝昭)’와 김진명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소설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1977년 일리노이(Illinois) 근처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의문사(疑問死)한 걸 두고 ‘노벨물리학상을 타기 직전 조국 대한민국 박정희 대통령에게 핵 개발 원리를 제공하고 의문사를 당했다’라고 스토리를 전개했다. 이에 대해 유가족은 명예훼손 등으로 법적 쟁송을 벌였으나 1995년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뛰어난 물리학자로서 국민들에게 많은 귀감이 될 수 있는 공인이 되었다고 할 것인데, 유가족들은 어느 정도 수인하여야 할 것으로 침해됐다고 볼 수 없다(94카합9230 판결)”라고 판시했다.

◇ 서양 물리학의 큰물줄기

서양 물리학의 대류(mainstream)를 더듬어보면 서양의 물리학은 자연의 지식으로 에너지와 힘 개념에서 우주(cosmos)와 시간(time)을 통한 물질의 움직임 및 현상을 규명하는 학문이다. 역사는 대략 3천년이 넘는 천문학과 같이 2천년 이상의 역사와 체계를 갖췄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에서 연유하고 탈레스, 데모크리토스, 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에 기원을 두고 있다. “좀 더 부드러운 조약돌이나 예쁜 조개껍데기를 비로소 발견했을 뿐이다”라고 했던 아이작 뉴턴(1643~1727)이 1666년 떨어지는 사과에서 운동 법칙과 우주 중력의 법칙을 발견한 것이 고전물리학의 시발점이었다.

당시 우주관이었던 지구 중심 모델에서 점차 벗어나기 시작해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1473~1543)가 태양 중심 모델을 구상했으며 1543년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통해 발표됐다. 요하네스 케플러(1571~1630)가 1609년 화성 관측 결과서 ‘신 천문학’을 출간해 케플러의 3법칙 중 타원궤도의 법칙(제1 법칙)과 면적속도의 일정의 법칙(제2 법칙)을 발표했다. 1619년 ‘우주의 조화’라는 저서에서 행성의 공전주기, 공전궤도의 반지름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제3 법칙을 완성했다. 이어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가 망원경과 천문학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1905년은 아인슈타인은 물론 세계 과학사에서 기적의 한 해다. 아인슈타인은 취리히대학에서 ‘분자 차원의 새로운 결정’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광전 효과, 브라운 운동, 특수상대성이론, 질량과 에너지의 동등성에 관한 4개 논문을 발표했다. 그때 불과 약관 26세였다.

1939년은 그에게 최악의 해였다. 아인슈타인은 독일 과학자들이 원자폭탄 경쟁에서 앞서가고 있고, 히틀러가 신무기에 의존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7월에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맨해튼 프로젝트를 권유하는 서신을 보냈다. 하지만 1954년 원자폭탄 제조를 주장했던 걸 후회했다. 현대물리학의 터전을 다진 막스 플랑크(1858~1947)는 양자역학의 창시와 고전역학의 부정확성을 규명했다. 제임스 클라크 맥스웰(1831~1879)은 1861년 빛의 속도를 예측하는 ‘맥스웰 방정식’을 주장했으나 1905년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special theory of relativity)’에 의해 수정됐다. 양자역학은 베르너 하이젠 베르크(1901~1976)와 폴 디랙(1902~1984)에 의해 새로운 광맥의 줄기를 찾아 탐광에 들어갔다.

글=정경은<코리아미래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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