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색에 대하여
흰색에 대하여
  • 승인 2020.05.12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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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색은 미뤄둔 사랑이다.
백에 하나라도 혹시 몰라서 밑바닥에 깔아 둔 명주 짜투리이다.
흰 말 타고 오려나 오늘쯤 그대는
멀쩡한 하늘 아래, 칼빛처럼 번뜩이는
흰색은 예감이다.
이젠 끝났다. 다시 시작
흰색은 낯선 출발이다.
찬서리 낮게 깔린 새벽의 고요
뿌연 길 걸어서 가출하는 마음이다.

흰색은 가난이다.
이른 봄 엎드려서 쑥을 캐는, 엎드려 밭두렁에 쑥을 캐는
온 들판에 널부러진 우리들의 입성이다.

흰색은 절망이다.
'이제는 여기 아무것도 없음' 손을 저어 보내는
흰색은 거절이다.
어제 같고 그제 같은 나날, 지치도록 바라보면
흰색은 순종이다.
외로운 탐색도 끝난 좌정.
수 천 수 만으로 떨어지는 나비떼
흰색은 황홀한 어지럼증이다.

물가루 안개비는 치근거리고
아무 생각도 없이 뜨고 사는 눈이여,
흰색은 무심이다.
아니다, 아니다, 흰색은 무지다.
비어 있음으로 눈물나는 순결이다.

함박눈 쏟아지는 고향 언덕엔
겨울 바람 펄럭이던 흰 치마자락.
불을 켜고 기다리는 어머니의 깃발이다.
흰색은 초월, 초월하는 슬픔
하얗게 목을 늘여 투항하고 싶은 오후 세시 바닷가
미칠듯한 적막이다 흰색은.

◇이향아= 1938년 충남 서천 출생으로 1963년 경희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년도에 전주기술전문여자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1966년에 현대문학에 찻길, 가을은, 설경으로 등단을 하면서 시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해설> 인간이 평생 가장 자주 느끼는 결핍감, 그것은 바로 외로움이다.우리 모두 예술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예술은 진실을 깨닫게 해주는 아름다운 거짓말이라 한다. 인간이 괴로움에 시달리는 근본 이유는 ‘나’라는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은 허상이고 느낌은 자기 환상에 불과하지만, 인간은 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좋고 싫고, 즐겁고 불쾌한 것들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두 가지 고통, 즉 절제의 고통 혹은 후회의 고통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우리는 성공한 사람들은 뒷짐 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직접 바깥으로 나갈 때는 항상 무언가가 발생한다. 창의성이 마주하는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는 실수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러나 상반되는 것은 늘 보완적인 것이다.초상화, 자서전, 얼굴화장의 핵심은 미묘한 과장이다. 사실은 눈앞에 보이는 정확한 면인 팩트(fact)이고, 진실은 일이 일어난 진짜 근본 원인이며 실상이다. 사람들의 심리적 불안은 사실을 알고 싶은 마음들이다. 정작 마음 기울여 준비해야 하는 D-day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기약할 수 없는 어느 날인지도 모른다. 언제, 어떤 모습, 어떤 형식으로 다가올지 모를 그날을 당황하지 않고 맞아들이려면, 매 순간 주어지는 내 몫의 삶을 후회와 부끄럼이 없도록 잘살아 내야 한다. 사유[思惟]하는 한 자신을 직시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사람은 살아서 생각 한 패배자일 수 없다. 슈뢰딩거의 고양이의 확률로 평형세계는 항상 존재함을 기억하면서.
-성군경(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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