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인상은 불멸 꿈꾸는 인간 욕망 자체”…루모스, 사진작가 윤길중展
“석인상은 불멸 꿈꾸는 인간 욕망 자체”…루모스, 사진작가 윤길중展
  • 황인옥
  • 승인 2020.05.12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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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간 무덤·마을 8백여곳 방문
표정 살리려 비오는 날도 작업
미소·부릅뜬 눈…다양한 표정
석인상 10점·석장승 9점 등 선봬
‘SEE SAW’ 연작도 동시 출품
통념 깨는 소재와 작업 방식
한국적 정서로 통일감 확보
사진작가 윤길중
대구 남구 이천동에 있는 아트스페이스 루모스에서 17일까지 사진작가 윤길중의 ‘Human Desire’전이 진행된다.

쓰러진 채로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나무, 무덤가나 마을 어귀에 세워진 석상, 생화와 조화를 섞어놓은 정물, 사람의 정면 얼굴처럼 촬영한 사찰의 정각, 방치되어 을씨년스러운 철거 지역, 중증 장애인…. 사진작가 윤길중이 바라보는 피사체들에서 매끈함과 팽팽함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세상의 중심에서 비껴난 소외된 대상들이자 윤 작가의 시선이 머무는 존재들이다. “중년에 찾아온 병마로 힘든 시기가 있었습니다. 아파보니 자연스럽게 타인의 삶에 시선이 갔죠. 특히 소외된 존재들에 시선이 계속해서 머물렀어요.”

지금까지 7개의 시리즈를 발표했지만 한 시리즈도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단단함이 작품에 깃들어 있다. 절제미와 정제미로 중무장한 사유의 공간들 때문이다. 완성도 높은 작품들에서 긴 호흡과 끈질긴 관찰력으로 집요하게 대상을 물고 늘어졌을 작가의 중첩된 시간들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지만 작가는 “실상은 좀 다르다”고 했다. 7개의 시리즈를 발표한 기간이 고작 10여년에 불과하다는 것. 누군가는 대가의 반열에 오르고도 남을 50세라는 늦은 나이에 사진을 시작한 탓에 작업 기간이 길지 않다는 것.

그가 “남들보다 적어도 30년은 늦은 시작이었다. 그들을 따라잡기 위해 치열하게 작업했다”고 회상했다. “하루에 3시간씩, 일주일에 20시간을 10년간 투자하면 한 분야의 일인자가 될 수 있다는 ‘만 시간의 법칙’을 믿고 열정적으로 작업에 임했어요.”

작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대구 남구 이천동에 있는 아트스페이스 루모스에 걸린 작품들은 ‘휴먼 디자이어(Human Desire)’ 시리즈와 ‘씨소우(SeeSaw)’ 시리즈에 국한했다. 작가의 작업 경향과 사진 철학의 정수가 녹아든 작품들이다.

‘Human Desire’ 시리즈는 ‘석인상’과 ‘석장승’ 사진으로 구성된다. 석인상은 돌에 사람의 형상을 조각해 무덤 옆에 세웠던 수호석이며, 석장승은 마을이나 사찰을 나쁜 기운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세운 상징물이다. 이들 석상들은 영생과 평안이라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현실태다. “선조들이 돌 조각에 담아내고자 한 정신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질문에서 석상 작업이 시작되었어요.”

5년여 동안 전국의 무덤과 마을 800여 곳을 찾아다녔고 1천700장 가까운 석인상과 석장승을 찍었다. 세월의 무게에 의해 푸석거리는 석상과 이끼의 느낌을 오롯이 살려내기 위해 특히 비오는 날에 길을 떠났다. “귀신이 씌였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산길을 헤쳐 무덤 앞 석상들을 찾아다니고 촬영하며 내린 결론은 ‘욕망’이었다. “석상에 영혼을 새겨 죽어서도 불멸을 꿈꾸는 인간의 욕망을 발견할 수 있었어요. 그러나 결국 무덤 속 망자도, 무덤 밖 석상도 세월이 흐르면 썩고 부식되어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진리도 함께 발견했죠.”

루모스에 선조들의 염원이 담긴 석인상 10여점과 석장승 9점, 그리고 석인상 1천개를 포토샵으로 모아놓은 ‘천인상(千印象)’ 등이 걸렸다. 특히 정형적인 얼굴을 하고 있는 석인상과 달리 석장승의 얼굴모습과 표정은 재미지다. 부피감 있는 얼굴, 크고 넉넉한 귀, 세밀한 수염, 입가에 머문 옅은 미소, 부릅뜬 퉁방울 눈, 분노에 벌름거리는 펑퍼짐한 코, 미소가 넘치는 입 등 정겨운 해학이 넘친다.

작가가 “석인상은 조선시대 선조들의 얼굴”이라며 “석인상이 아니었으면 선조들의 얼굴을 만나기 힘들었을 것”이라며 사료로서의 가치를 언급하기도 했다.

작품 ‘씨소우(SeeSaw)’ 시리즈는 두 가지 프로젝트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나는 실물과 모형을 섞어서, 그리고 하나는 과일 등 오브제를 불에 태움으로써 색을 지워 촬영했다. 사진을 찍은 뒤 같은 사진을 전통한지에 두 장 프린트한 후 씨실과 날실의 형태로 잘라 천을 짜듯 직조한 작품이다.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이미지를 다른 개념이나 형태로 바꾼 형식을 취한다.

작가가 “사물을 이미지가 아닌 본질로 보게 하고 싶었다”고 했다. “우리가 사물을 인식할 때 기억된 이미지로 판단하기 때문에 기억 속에 이미 익숙한 이미지에는 시선을 잘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미지를 낯설게 하기 위해 실물과 모형을 섞거나 사물을 불에 태워 촬영하고 그리고 촬영한 이미지를 해체하여 직조하는 등의 방식으로 오브제를 바라보는(see)데 오히려 방해요소를 개입시켜 새로운 이미지를 생산하고 그 과정에서 본질에 접근하려 합니다.”

루모스에는 소개하지 않았지만 ‘아름답지 않다 아름답다’ 시리즈는 보다 파격이다. 피사체로 금기에 가까운 중증 장애인을 찍었는데 더욱 파격은 그들의 누드 사진도 촬영했다는 것. 사지가 뒤틀리고 일그러졌지만 사진 속 장애인들의 표정은 꽃처럼 화사하고, 누드에서는 신체의 숭고한 아름다움이 배어난다. “장애인 시리즈는 국내에서 두 번 소개했지만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누드 사진은 아직 국내에서 발표하지 못했어요. 작년에 시드니에서 열린 ‘Head On Photo Festival’ 메인 작가로 초대되어 ‘Nude’ 전시를 했습니다.”

윤길중의 사진은 통념을 넘어선다. 파격적인 소재는 물론이고 개념이나 작업 방식에서도 낯선 측면이 강하다. 그러나 공통으로 흐르는 기류는 있다. 작품에 흐르는 정서가 ‘한국적’이라는 것. 이질적인 소재들과 특이한 작업방식 등에서 자칫 흩어질 수 있는 집중도를 ‘한국적’이라는 따뜻하면서도 소박한 정서로 확보하고 있다. 이때 활용되는 인화지가 ‘전통한지’다. “외발뜨기라는 전통방식으로 제작한 한지로 인화해 사진에 한국적인 정서를 담아내고자 했어요.”

사진 경력 10년 남짓이다. 평생을 사업가로 살아오다 불현듯 사진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천직이다 싶을 만큼 사진의 매력에 빠져들었지만 비전공자의 설움도 없지는 않았다. 학벌사회에서 비전공자에게 허락된 문은 좁았던 것. 그래서 문을 두드린 것이 해외였다. 작년에만 호주 시드니, 미국 휴스턴, 벨기에 부르셀 등 3곳에서 초대전을 가졌다. 코로나 19로 연기된 상태지만 올해도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시립미술관에서 전시가 잡혀 있고, 멕시코의 사진대가인 페드로 마이어 (Pedro Meyer) 초청으로 멕시코시티에서 미술관급 전시가 예정되어 있다.

“타인의 흔적에서 저의 아픈 기억들을 더듬어 보는 사진 작업은 제게 치유의 과정인 것 같습니다.” 루모스의 ‘Human Desire’전은 17일까지며, 7월 서울과 8월 광주전으로 이어진다.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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