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 그도 한때는 無名 공무원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 그도 한때는 無名 공무원
  • 김종현
  • 승인 2020.05.13 21: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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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노벨상을 품자 - (14) 공무원 출신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스위스 ‘샤를 에두아르 기욤’
국제도량형국 공무원으로 활동
온도·기상학·미터법 등 연구
1897년 ‘인바’라는 신물질 발견
온도에 부피변화 없어 백금 대체
독일 ‘알버트 아인슈타인’
유대인 부모 아래 장남으로 자라
‘반유대주의’에 학교 적응 못해
독일 나와 스위스 학교 다녀
노벨상-공무원
아인슈타인도 공무원을 지낸 뒤 노벨물리학상을 탔다. 그림 이대영

1913년 수상자 헤이커 카메를링 오너스(Heike Kamerlingh Onnes, 1853~1926)는 1853년 네덜란드 흐로닝언(Groningen, Netherlands)에서 태어났다. 수학과 물리학에 대한 관심을 가졌으며 1870년 흐로닝언대학교((University of Groningen)에 입학해 공부하다 1871년 독일로 옮겨 하이델베르크대학교(University of Heidelberg)에서 1873년까지 수업을 듣다가 다시 흐로닝언대학교로 되돌아왔다. 1878년 석사학위를 받고 루돌프 아드리안 메스(Rudolf Adriaan Mees) 교수의 지도로 ‘지구 순환의 새로운 증거(Nieuwe bewijzen voor de aswenteling der aarde)’학위논문으로 1879년에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가 이렇게 대학 사냥(college hunting)을 한 속셈에는 노벨물리학상 수상이라는 꿈이 있었다. 1911년 수상자 판 테르 발스((Johannes Diderik van der Waals, 1837~1923)를 벤치마킹해 그의 업적인 기체 액체 상태의 방정식(Gas-Liquid Equations)에 착안해 온도와 압력의 연구에 집중했다. 1894년 레이던 대학교(University of Leiden)에 저온연구소(Low Temperature Laboratory)를 설립해 연구했으며, 1904년 액체공기와, 1906년 액체수소를 제조했다. 그리고 1908년 절대온도 269℃에서 헬륨 액화에 성공했다. 이어서 초전도 현상(superconductivity phenomenon at metal low temperature)까지 발견해 극저온물리학을 개척했다.

1939년 수상자인 미국 물리학자 어니스트 올란도 로런스(Ernest Orlando Lawrence, 1901~1958)는 미국 사우스다코타 켄턴(Canton, South Dakota, U.S.)에서 태어났다. 공립 고교를 졸업하고 세인트 울라프 대학교(St. Olaf College, Minnesota)에서 한 학기를 수업하고, 사우스다코다 대학교(University of South Dakota)로 전학해 1922년 화학 학사학위를 취득했다. 1923년 미네소타대학교(University of Minnesota)에서 물리학 석사학위를 취득해 시카고대학에서 1년간 일하다가 예일대학교(Yale university) 윌리엄 프란시스 그레이 스완(William Francis Gray Swann, 1884~1962) 교수의 지도로 ‘빛의 주파수의 함수로서 칼륨 증기의 광전효과(The Photoelectric Effect in Potassium Vapor as a Function of the Frequency of the Light)’에 관한 학위논문을 1924년에 제출하고, 1925년에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곧바로 모교 예일대학교에 연봉 3천달러의 조교수 자리를 얻었으나, i) 강의 경험이 없었고, ii) 출신 지역이 사우스다코타라는 이유로 동료들의 질투와 함께 따돌림을 당했다. 1928년에 캘리포니아대학교(Berkeley Campus, University of California)로 옮겨 조교수에 임용되었으며 1930년에 정교수가 되었다. 그는 입자가속기(particle accelerator), 핵에너지의 열쇠를 쥐고 있는 사나이(a man holding the key to nuclear energy)라는 별명을 얻었다. 1930년 식당에서 롤프 비데뢰(Rolf Widerøe, 1902~1996)의 논문을 보다가 ‘냅킨 종이 한 장에 그린 스케치(from a sketch drawn on a sheet of napkin paper)’로 25달러를 들여서 최초로 입자가속기 사이클로트론(cyclotron)을 발명했기 때문이다. 1936년 대학 부설 방사선연구소장에 올랐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과감하게 버클리 캠퍼스(Berkely Campus)에서 뛰쳐나와 맨해튼프로젝트(Manhattan Project)에 참여했다.

◇국제도량형국 공무원으로 노벨물리학상을

1920년 수상자인 스위스 물리학자 샤를 에두아르 기욤(Charles Edouard Guillaume, 1861~1938)은 스위스 취리히 연방공과대학(ETH Zurich)에서 1883년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국제도량형국(International Bureau of Standards)에 국제공무원으로 들어갔다. 1875년에 설립된 이 기구는 파리 인근 센(Seine) 강 주변의 인구 2만의 작은 도자기 도시인 세브르(Sevres)에 있다. 그는 업무 수행을 위해서 온도 측정, 기상학, 미터법 등에 대한 실험과 관찰을 하며 깊이 연구했다. 도량형이 온도 변화에 따라 오차가 발생함을 알고 이를 해결하고자 했던 그는 1897년 신물질인‘인바(invar)’라고 하는 니켈강을 발견하였다.

1902년에 책임연구원이 됐으며 1915년에 국제도량형 국장에 올라 20년간 활동을 했다. 스웨덴 왕립과학원에서는 1920년에 노벨물리학상을 수여하면서 시상식에서 “수년간 지루하고 어려운 실험 끝에 마침내 온도 변화에도 부피 변화가 전혀 없는 인바라는 니켈을 발견했습니다. 백금 대체용품으로 2천만 프랑의 비용을 절감하게 됐습니다.”라고 스웨덴 왕립과학원 원장 A. G. 엑스트란드(A.G. Ekstrand, President of the Royal Swedish Academy of Sciences, on December 10, 1920)는 수상자 선정보고에서 언급했다.

그의 저서로는 1896년 ‘우주의 온도(La Temperature de L‘Espace)’, 1886년 ‘온도에 대한 연구(Etudes thermometriques)’, 1889년 ‘온도에 대한 논문(Traite de thermometrie)’, 1894년 ‘단위 및 표준(Unites et Stalons)’, 1896년 ‘엑스레이(Les rayons X )’, 1898년 ‘니켈 및 그 합금에 관한 연구(Recherches sur le nickel et ses alliages)’, 1899년 ‘물질의 생명(La vie de la matiere)’, 1902년 ‘미터기 협약과 국제 중량 측정 기구(La Convention du Metre et le Bureau international des Poids et Mesures)’, 1904년 ‘니켈강의 응용(Les applications des aciers au nickel)’, 1907년 ‘물질의 상태(Des Stats de la matier)’, 1913년 ‘레알 마드리드의 기술’, 1913년 ‘메신저의 입문 등이 있다.

◇ 특허청 직원으로서 상대성원리를 구상

1921년은 천재 물리학자이며, 최고의 지능지수(IQ)를 지녔다고 알려진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이 ‘이론물리학에 대한 공로와 특히 광전효과의 법칙 발견의 공로(for his services to Theoretical Physics, and especially for his discovery of the law of the photoelectric effect)’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그는 독일 뷔르템베르크 울름(Ulm, German Empire)에서 전기 회사 사장이었던 유대인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1살 때에 뮌헨으로 이사했다. 초등학교 시절 반유대주의로 인해 상처를 많이 받았다. 특히 로마가톨릭 학교에서 교사가 했던 “유대인은 예수를 죽인 민족”이라는 말이 가슴에 못이 되었다.

1894년 아버지 사업의 부진으로 밀라노로 이사했다. 이후 독일의 군대식 교육기관인 김나지움에 진학했으나 잘 적응하지 못했다. 17세 때 “다시는 독일 땅을 밟지 않겠다(Ich werde nicht wieder auf den deutschen Boden treten.).”라고 결심하고 학교를 나와서 독학을 해 스위스 취리히연방 공과대학(ETH Zurich) 입학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수학 성적을 눈여겨본 학장의 배려로 1년 동안 김나지움과 달리 자유롭고 민주적인 분위기인 스위스 아라우의 아르가우(Aargau) 칸톤 학교에 다니면서 부족한 과목을 보충했다. 이후 1896년 취리히연방 공과대학의 전신인 연방 폴리테크 스쿨(Federal Polytechnic School)에 입학해 1900년까지 다녔다. 졸업하고도 한동안 가정교사, 임시교사 등을 전전하다 1902년 베른 소재 특허사무소(Swiss Patent Office Bern) 심사관으로 채용돼 5년 동안 근무했다.

글=정경은<코리아미래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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