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줌인아웃] ‘리차드 쥬얼’...실화에 근거한 영화의 화자에 대하여
[백정우의 줌인아웃] ‘리차드 쥬얼’...실화에 근거한 영화의 화자에 대하여
  • 백정우
  • 승인 2020.05.14 21:1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칼럼-리차드쥬얼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사제폭탄테러 현장. 폭탄가방을 최초로 발견해 큰 참사를 막은 영웅으로 칭송받지만, 곧바로 FBI에 의해 가장 유력한 범인으로 지목된 남자의 이야기. 거장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출한 ‘리차드 쥬얼’은 강직하고 의로운 한 남자가 영웅에서 테러범으로 추락하고 극적으로 생환하기까지를 묵묵히 증언하는 연대기다. 국민의 알권리를 방패로 삼은 언론의 인권유린과 국가가 개인의 선의를 짓밟는 과정을 낱낱이 밝혀 극단적 보수주의로 회귀한 미국 사회에 던지는 경종이기도 하다.

90년대 이후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국가가 시민을 보호해주지 않는 시대에, 불의에 맞선 개인의 분투를 그려왔다. 이를테면 ‘트루 크라임’에서 ‘미스틱 리버’와 ‘체인질링’을 거쳐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까지, 부당하게 박해받는 시민의 이야기는 그의 오랜 화두였다. 국가정보기관의 과잉수사와 언론의 인권유린에 대항하는 소시민의 이야기 ‘리차드 쥬얼’ 역시 동일 선상에 놓인다.

‘리차드 쥬얼’은 실화를 바탕으로 마리 브레너가 쓴 ‘리차드 쥬얼의 발라드’를 빌 레이의 각본을 거쳐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출한 영화이다. 통상의 실화를 다룬 영화는 오프닝에서 ‘실화’ 또는 ‘실화에 근거했으나 허구’라고 표기한다. 영화 시작에 등장하는 실화, 실화에 근거한, 실화에 근거했으나 허구라는 언급이 지시하는 바는 관객을 관람자가 아닌 사건의 목격자 위치에 초대하는 행위이다. 그러니까 당신은 이것을 봐야 하고, 어떻게든 응답해달라는 요청인 것이다. 이런 영화들 대부분이 사회성 짙은 드라마와 도덕적 이슈를 다루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 도식을 가볍게 돌파한다. ‘실화에 근거’했다고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실화(實話)는 정말 ‘실제 이야기’로 관객과 만나는가에 대한 문제로 이어진다. 영화는 누구의 목소리로 말하는가. 즉 화자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이다.

영화란 감독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미장센과 편집과 모든 것에 담긴 시선, 즉 영화의 최종 화자는 감독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리차드 쥬얼의 목소리가 아닌,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세계관을 경유하여 도착한 영화와 만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펼쳐온 세계관과 연출력이라면 ‘실화’라는 표식 없이도 능히 관객의 정서적 동참을 끌어낼 수 있을 터였다. 무엇보다 ‘실화에 근거’했음을 밝힐 때 벌어질 위험성, 즉 리차드 쥬얼이 테러용의자로 지목될만한 프로파일을 가진 인물이라는 편견에, 관객이 함몰되는 것을 일찌감치 경계한 까닭은 아니었을까.

윤리적 문제와 객관성에 대한 오랜 의심에도 불구하고 실화에 근거한 영화가 계속해서 만들어지는 까닭은 간단하다. 언어와 글이 온전히 전달하지 못한 실제적 느낌을 전달하는 것. 텍스트 장벽을 가볍게 돌파하여 관객에게 동질감을 불러일으키고 호응과 동의를 얻어내기에 이만한 도구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실화에 근거한’ 대부분 영화가 견디지 못하는 유혹이다. 다른 한편으로 실화(true story)에 기대지 않고도 실제(reality)로 스크린에 실재(real)화할 수 있다는 자신감, 혹은 국가와 권력에 의해 자행되는 ‘어처구니없는 실화’가 다시 발생해선 안 된다는 신념도 여기에서 출발한다. 그 어려운 일을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또 해냈다.

백정우ㆍ영화평론가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