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의 형태가 내어준 無言의 시간…갤러리 굿스페이스, 김용국展
최소한의 형태가 내어준 無言의 시간…갤러리 굿스페이스, 김용국展
  • 황인옥
  • 승인 2020.05.17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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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개로 구분되는 ‘십자가의 길’
구체적 이야기 과감하게 생략
다크블루 배경은 묵상공간을
밝은색 라인은 등장 인물 표현
수천년간 고정된 성화 재해석
‘어둠 속 한 줄기 빛’ 구현 집중
“정확히 인지할 수는 없어도
숭고한 무언가 느낄 수 있길”
2개_김용국작
김용국 작 ‘십자가의 길’ 연작.

갤러리마다 공간적인 특성이 각양각색이지만 갤러리 굿스페이스(GOODSPACE)에게 유난히 공간에 대한 언급이 쏟아진 것은 독특한 구조 때문이다. 세로로 긴 직사각형 구조와 높은 층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예사롭지 않다. 초대됐던 작가들이 “공간 해석에 공을 들였다”고 입을 모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작가 김용국에게도 굿스페이스는 도전으로 다가왔다. 전시 초대를 받고 일찌감치 조각 작품을 구상하고 모형까지 만들었지만, 막상 공간을 둘러보고 불가피하게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공간에서 종교적인 숭고함을 발견하고 묵상적인 작품들을 걸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결과 설치 대신 평면 작업이 중심을 잡게 되었다. 지난 12일 개막한 작가의 개인전에 묵상과 기도가 교차했다.

“전시 준비 기간이 사순절과 겹쳐지기도 했고, 전시장이 예배당과 비슷한 느낌이 있었어요. 그래서 ‘영적인 묵상의 공간으로 꾸미면 어떨까’ 하는 결론을 내렸죠.”

‘묵상’과 ‘기도’라는 핵심 키워드는 ‘십자가의 길(The Stations of The Cross)’ 연작으로 펼쳐졌다. 예수가 사형 선고를 받고 십자가를 멘 채로 골고다까지 가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까지의 ‘열네 모습(14처)’을 김 작가의 독특한 감성으로 재해석했다. 이때 형상은 배제되고 추상성이 중심을 잡았다. 다크 블루로만 배경을 처리하고 예수를 비롯한 마리아 등의 등장인물들은 1.4m의 황금빛 얇은 세로 띠로만 표현했다. 작품 밑에 로마 숫자 1부터 14까지를 기록해 ‘십자가의 길’ 이라는 것을 암시했다. 이로써 작가의 ‘14처’가 완벽하게 새로운 위용을 갖췄다. “회화 공간이기보다 숭고함의 대상으로 접근하려 했어요.”

이른바 성화(聖畵)다. 수천년간 내려온 종교화를 작가의 종교관과 인생관이 녹아든 묵상화로 재해석 했다. 큰 용기가 필요한 작업이었을텐데 작가는 “주저함이 없었다”고 했다. ‘십자가의 길’이 전하는 메시지인 ‘한 줄기 구원의 빛’을 따라가다 보면 분명 답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가 “어두움 속에서 한 줄기 빛이 스며드는 순간을 잡아내는 것이 관건”이었다고 귀띔했다.

‘한 줄기의 빛’은 블랙 위에 수백번 덧칠한 블루에서 찾았다. 빛을 칠하고 그 위에 다시 어둠을 중첩하면서 숨겨진 빛을 찾아갔다. “어느 순간 한 줄기 빛이 찾아오는 찰나가 있습니다. 그 순간을 잡아냈고자 했어요.”

가톨릭을 모티브로 했지만 특정 종교를 초월하는 화면을 원했다. ‘십자가의 길’이 전하는 ‘고난’과 ‘빛’의 메시지 속에서 인간 보편의 운명을 발견했고, ‘십자가의 길’을 누구나 공감하는 초월적인 세계로 녹여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기에는 "예수의 고난의 길과 끊임없이 찾아오는 고난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을 따라 터벅터벅 걸어가는 인간의 운명이 다르지 않다"는 작가의 해석이 뒷받침됐다.

“물질적인 공간보다 명상의 공간을 구현하고자 했습니다. 정확히 인지하지는 못하더라도 숭고한 무언가 앞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의 느낌을 찾았어요.”

이번 전시에는 소개되지 않았지만 작가가 발표했던 사진 작품인 ‘지화(紙花)’에 그의 예술철학이 도드라진다. 지난한 과정을 거치면서 지화가 만들어지고 종국에는 불태워지는 허공에 흩어지는 지화의 일생에서 인간의 운명을 보았다. “지화는 장례식이나 궁중의식에 사용된 꽃입니다. 한지를 명주실로 묶어서 5~6년 방치했다 꽃으로 만들어졌다가 의식이 끝나면 태워집니다. 그 모든 과정이 태어나 치열하게 살다 결국 죽음에 이르는 인간 삶의 여정을 보았죠.”

김 작가는 영남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했다. 하지만 그가 발표한 작품들의 면면을 보면 조각 전공자라는 정체성이 무색해진다. 주제와 가장 밀착된 매체를 선택해왔고, 그 결과 회화, 사진, 조각, 설치 등 다양한 어법을 구사했다.

이번 전시에는 회화 작품 외에도 조각 작품 ‘destruction of belief, I wood’을 바닥에 놓았다. 나무통 속에서 납이나 나무로 만든 물결 모양의 형상이 밀려 나오는 형상을 하고 있는 작품이다. 작가가 지속적으로 견지해온 주제 ‘신념의 파괴’ 연작의 새로운 버전에 해당된다.

그가 짐짓 무거운 목소리로 “지난 십년간 작업을 쉬었다”고 했다. 타인의 생각을 수용하며 다양성을 인정해야 하는 작가 집단마저도 편협함에 휩싸이는 것을 보고 ‘우리가 믿는 신념들이 정말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공고한가?’에 대한 의문이 생겼고, 작업을 접었다. “작가야말로 다양성을 추구해야 하는 집단인데 정작 미술계의 풍토는 그 반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시금 작품 앞에 선 것은 짖누르는 예술에 대한 무게감 때문이었다. 예술가의 길을 걸었던 사람이 결국 남길 것은 작품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편협함에 대한 비판이든 수용이든, 결국 작가는 작품으로 이야기 해야 하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 작품 ‘신념의 파괴’ 연작은 “우리가 믿고 있는 신념이 얼마나 가벼울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작업에 임하며 현란한 개념이나 이론으로 화려하게 포장하는 것을 경계했다. 다양한 형태의 진솔한 노동이면 족하다고 믿음이 있었다. 작업 과정에 스며드는 숭고한 노동이 논리정연한 이론의 힘보다 강하다는 믿음이었다. 

작가가 “누군가가 작품을 보면서 저의 행위를 발견해내고 그것에 잠시라도 흔들렸다면 작가로서 그것은 최고의 영예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결국 그는 “무엇 때문에”라는 질문을 굳이 던지지 않더라도 작품에서 배어나오는 화학작용으로 감동이 물결처럼 출렁이는 작품을 고집한다.

“전시장 바닥에 봄에 피는 노란 꽃가루를 깔아놓았을 때 노란 꽃가루 자체에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그 많은 꽃가루를 찾아 다녔을 작가의 지난한 행위에 의미를 두기 마련이죠. 정신성은 바로 그 꽃가루를 수집하는 지난한 과정 속에 드러나게 마련이죠.” 전시는 6월 6일까지. 053-421-9575

황인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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