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간’ 잘 버티도록…풍경이 보내는 위로
‘코로나 시간’ 잘 버티도록…풍경이 보내는 위로
  • 황인옥
  • 승인 2020.05.24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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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스페이스펄, 김건예 개인전
자연에 불안정한 팬데믹 상황 이입
씨실·날실 엮은 듯한 격자무늬 채색
조직 강요하는 현대사회 구조 표현
사계 담은 신작 회화 20여점 선봬
다시-김건예개인전
김건예 개인전이 아트스페이스 펄에서 6월7일까지 열린다.

땅에 바짝 엎드린 식물들이 먼저 연초록 잎을 틔워내자, 기다렸다는 듯이 허공을 가르는 나뭇가지에도 잎들의 외출이 분주하다. 봄이 생명을 틔워내는 질서다. 가을은 어떨까? 땅 위의 식물들이 먼저 사그라들고 나뭇잎을 떨궈낸다. 자연은 각자 부여받은 순리에 따라 생멸을 이어간다. 작가 김건예의 작품 ‘잃어버린 계절’에도 순응하는 자연의 질서가 오롯이 드러난다.

흔히 순환의 질서에 순응하는 자연 풍경을 떠올리면 눈이 밝아지고, 마음까지 환해진다. 목가적이고 낭만적인 풍경 앞에 마음의 빗장을 스르르 연다. 하지만 작가의 풍경은 왠지 모를 불안한 기운이 엄습한다. 나무 밑둥치는 뚝 잘라내고 앞사귀를 떨궈낸 나뭇가지의 속살들이 어지러이 얽혀있어 풍경에서 거친 숨소리가 배어나오는 듯하다.

작가가 “마음 속 풍경”이라고 했다. “코로나 19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면서 오히려 작업에 집중할 수 있었지만 코로나 19가 순식간에 일상을 삼켜버리며 불안전해 진 마음 상태가 이입된 풍경이에요.”

작가 김건예 개인전이 아트스페이스펄에서 최근 개막했다. 전시에는 사계절의 풍경을 담은 신작 회화 20여점을 모았다. 작가가 “코로나 19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면서 집중했던 풍경 신작들”이라고 소개했다.

풍경은 예전에도 간간이 그렸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조연에 국한됐다. 사람이나 사람을 은유한 사슴이 주인공이었다. 그녀가 바라보는 대상은 오직 인간에 집중됐던 것. 이런 존재들을 통해 작가가 펼쳐내고자 한 주제는 현대성. 현대사회의 병리현상에 노출된 개인이나 사회문제에 초점을 맞췄다. 익명성 속에 숨은 현대인, 물질만능에 가려진 인간소외, 성(性)에 억압받는 남녀 등 다양하다.

“벌거벗은 몸에 꽃이나 진주 목걸이를 휘감은 소녀나 형태만 인식할 수 있도록 흐릿하게 처리한 세련되게 차려입은 남자나 여자 등 다양한 현대인의 자화상이 비판적인 시각으로 서술해 왔어요.”

그림을 그리면서 인물이 작가의 의식 언저리를 맴돌았지만 작품에서 본격화된 것은 독일 유학 시기다. 대구효성가톨릭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독일로 유학을 떠난 후부터였다. 독일에 혼자 떨어지자 독일사회의 일원인 아닌 철저하게 이방인의 신분과 시각으로 살게 되면서 정체성의 문제에 부딪혔다. 그때의 감정상태가 인물의 형태로 표현되었다.

“어린시절부터 사람에 관심이 많았어요. 사람들의 제스처나 얼굴표정에 감동을 받았죠. 인물에서 개성있는 풍경화를 보았다고 할까요? 자연스럽게 인물을 화폭에 끌고 왔던 것 같아요.”

독일생활 13년간은 안락했다. 흔히 짐작하는 힘겨운 유학생활과는 거리가 있었다. “유학생 신분인데 이처럼 완벽할 수 있나” 싶을 만큼 작가로 생활하기에 부족함 없는 환경이 주어졌다. 뒤셀도르프 변호사협회에서 주관하는 신진작가 공모전에 1등상을 수상하고, 레히베르크하우젠 시의 카스파-모아 아뜰리에 첫번째 장학생이 되는 영광을 누리는가 하면, 스튜트가르트에서 바덴-뷰르텐베르크 주립 레지던시 입주작가 프로그램에 선정되어 작업실과 년간 10,000 유로를 지원받는 행운을 누리게 됐다.

외국인 유학생에게 이례적으로 주어진 특별한 기회였고, 그녀의 행보들은 지역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온실 속 화초처럼 안락한 작업 환경 때문이었는지 작품의 완성도도 그에 비례해 높아졌다. 지역 화단의 평가도 호평 일색이었고, 독일에서 그린 작품 대부분이 판매됐다.

하지만 10여년의 타국생활에서 오는 지독한 향수병과 점점 까다로워지는 비자 문제에 당면하면서 입국을 결심했다. 국내로 돌아오면서 안락한 환경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전업작가로 홀로서야 하는 척박한 환경에 놓여졌다. 그러면서 작품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사회현상에 눈을 뜨기 시작하자 독일에서와 달리 화면이 어두워졌다. 사회적인 이슈들이 작품 속으로 들어온 것. “예술은 배가 고파야 한다는 말이 왜 생겼나 싶어요. 환경이 좋을수록 작업의 몰입도가 높아 완성도도 함께 좋아진다는 것을 국내에 와서 알게 되었어요.”

한국사회는 초연결사회다. 정치, 경제, 사회의 변화가 급격하게 진행되면서 급작스럽게 초연결 사회가 되었고, 그 과정에서 생겨난 개인의 정체성 상실이 작가의 의식을 건드렸다. 개인성의 존중보다 사회 일원으로 강요받으면서 인간소외와 개인성 상실의 문제가 노출되었고, 그런 현상을 목도하는 작가의 가슴에 찬바람이 일었다.

그러면서 그림이 변했다. 독일에서 그렸던 인물은 그대로 가져가면서 화면은 어두워졌다. 특히 격자무늬가 도드라졌다. 사회 구성원의 개성보다 조직 속의 일원을 강요받는 현대사회의 구조적인 시스템을 가로세로의 연속된 붓질이 만든 격자무늬인 그리드로 표현했다. 그리드는 김 작가 회화의 특징이 되었다.

그리드는 독일 유학 시절에도 구사한 표현기법이지만 입국해 더욱 강화된 경향이 짙다. “그리드는 현대사회와 현대인의 속성을 대변하고 있어요. 사회 관계망 속에 얽혀 있는 조직이나 개인에 대한 이야기죠.”

그림을 그리기 전, 화면 구성은 철저하게 설정에 의한다.  작품 속 주인공이 되는 모델을 섭외하고, 인물을 치장하는 소모품이나 주변 환경은 모델과 상의하는 과정에서 즉흥적으로 꾸려진다. 모델과의 소통은 모델이 가진 개성을 살리기 위한 방편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진행하는 과정이다. “사회 속에서, 무리 속에서 정체성을 잃어가는 현대인을 모습을 모델의 제스쳐나 표정, 이야기 속에서 찾아내려 했어요.”

인물도 변하고 그리드도 변화를 거쳤다. 독일 유학시기에는 서정적으로 표현되었던 인물이 국내 활동으로 넘어오면서 도회적이 되었다가 지금은 둘 사이의 균형감을 찾고 있다. 그리드 역시 화면 가득 표현되었다가 일부에만 국한 되는 등 자유로운 변화를 모색 중이다.

이번 전시에 인물이 빠진 순수한 풍경을 소개한 작가가 “풍경만으로 전시를 해도 되는지 고민이 살짝 들었다”며 “코로나 19로 움츠려든 우리 모두에게 우리의 모습을 풍경으로 은유하면서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며 만족감을 표했다. “인물을 통한 사회현상을 짚어내는 작업은 계속될 겁니다. 그 와중에 풍경 작업도 간간이 해 나갈 것 같아요.” 전시는 6월 7일까지. 문의 053-651-6958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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