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 2차 기자회견
[영상]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 2차 기자회견
  • 뉴미디어부
  • 승인 2020.05.25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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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92) 할머니가 25일 오후 대구 수성구 만촌동 인터불고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시작하며 문건을 들어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92) 할머니가 25일 오후 대구 수성구 만촌동 인터불고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시작하며 문건을 들어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영상취재: 조혁진 수습기자)

 

※25일 대구 인터불고 호텔에서 열린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 발언 전문을 구어체로 옮겨 적었습니다. (편집자 주) 

 

여러분, 이건 전에 처음에 기자회견할 때 있었습니다. 있는데 이것을 제가 읽기는 조금 힘듭니다. 해서 이것을 전부 카메라로 찍었으면 좋겠습니다. 한 부밖에 없는데.  

그래서 이것은 이따 돌려드리도록 하고. 제가 두 번째 기자회견을 합니다. 누구를 원망하고 또 잘못했다고 하는 건 제가 처음에 기자회견 할 때 했는데 너무 보니 많이 생각 못하는 것이 나왔습니다.

그것은 제가 생각하기에는 검찰에서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정신대대책협의회입니다. 정신대대책협의회는 공장에 갔다 온 할머니들입니다. 그런데 공장에 갔다 온 할머니들 하는 건 정신대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장에 갔다 온 할머니하고 위안부, 아주 더럽고 듣기 싫은 위안부하고는 많이 다릅니다. 공장에 갔던 할머니들은 공장에서 일하고 했지만 위안부 할머니는 간 데가 다 다릅니다. 잠깐 제가 갔던 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나이로 하면 열여섯 살. 만으로 하면 열네 살입니다. 저는 양력으로 돼 있습니다. 왜? 그때 성을 갈지 않으면 배급을 안 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을 갈아서 야스하라라고 갈았습니다.

그런데 학교도 그때는 일본 학교입니다. 제가 3, 4학년까지 다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타카나를 알았습니다. 끌려가서도 대만 신주 가미가데부대, 특공대 부대로 끌려가서도 그 장교가 가타가나로 써줘서 대화를 했습니다.

이 군인이 하는 얘기도 피해자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면 제가 처음 듣는 얘기라서 히가이샤, 히가이샤가 뭔지 적어주는 걸 외우게 했습니다. 이 군인이 이름을 지어줬습니다. 도시코, 야스하라 도시코라고 지어주면서 나도 도시코 같은 피해자라는 걸, 히가이샤라는 걸 적어줬기 때문에 히가이샤가 뭔가 몰랐습니다.

그 후에 제가 생각할 때 끌려가서 당한 건 말로는 못합니다. 제가 쭉 30년 동안 해 오면서 미국으로 어디로 다니면서 증언을 했습니다. 그러면 제가 확실하고 또 바른말 하고 이러니까 정신대대책협의회라는 데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제가 92년도 6월 25일 신고할 때 윤미향이라는 간사였습니다. 간사한테 했습니다. 25일날 했는데 29일날 모임이 있다고 오라고 해서 갔습니다. 어느 교회입디다. 교회에 갔었는데 그날따라 일본 어느 선생님이 정년퇴직을 하고 돈을 1000엔인가 얼마인가 줬다고 하면서 100만 원씩 나눠줬습니다.

그게 무슨 돈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때부터 모금하는 걸 저는 봤습니다. 왜 모금을 하는지 그것도 몰랐습니다. 따라다니면서 모금하는 데 보니까 농구선수들이 농구를 하는데 기다렸어요. 기다려가지고 그 농구선수가 돈을 들고 모금을 하더라고요. 그 돈을 받아오더라고요.

그래도 저는 그게 왜 그런 줄 몰랐습니다. 그게 당연히 그런가 보다 했는데도 좀 부끄러웠습니다. 저렇게 막 농구를 하면서 이기려고 애를 쓰고 이렇게 하는데 거기에 버젓이 앉아서 농구 끝나면 돈을 걷는 걸 받아서 나왔습니다. 좀 늦었습니다. 늦었었는데 배가 고픈데 맛있는 걸 사줘 하니까 돈 없습니다, 돈을 걷어가지고. 그래도 그런가 보다 생각했습니다.

어디 가도, 또 교회 가도 또 돈을 주면 그걸 그런가 보다 생각했는데 그래도 모르고 쭉 30년을 해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무엇입니까.

정신대대책협의회입니다. 그러면 공장 갔다온 할머니들로 해야 되는데 빵으로 말하자면 공장 갔다온 할머니들은 밀가루로 반죽해서 만두를 빚어놓고 속에는 맛있고 귀한 걸 넣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속은 위안부입니다. 그런 그걸 해도 쭉 30년을 해 와도 저는 그걸 몰랐습니다. 그제까지도 몰랐습니다. 어제 저녁에 가만히 생각하니 이것은 왜, 뭐 때문에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 모임이 위안부, 생명을 걸고 끌려간 위안부를 왜 자기가 정신대 할머니랑 합해서 쭉 이용했었습니다.

저는 그것도 당연한 줄 알았습니다. 어제 제가 생각하니 이럴 수가 있나. 30년 동안 앉아가지고 얘기하는 게 사죄해라, 배상해라 하는데 일본 사람이 뭔 줄 알아야 사죄하고 배상하죠. 섞어서 이건 사죄도 하지 말고 안 해도 된다는 거 아닙니까?

이걸 30년 동안 해 오면서도 사죄, 배상을 요구하고 그 학생들까지 고생을 시켰습니다. 그 학생들, 돼지 털어서 나온 그 돈도 받아가지고 챙겼습니다. 이래서 저 어제 저녁에 잠도 한잠 못 잤습니다.

왜 뭐 때문에 정신대대책협의회만 정신대 문제만 하지 자기가 무슨 권리로 위안부 피해자를 만두의 고명으로 사용했습니다. 이것을 생각하니 저는 자다 일어나서 펑펑 울었습니다. 왜 내가 이렇게 바보같이 이렇게 당하면서 내가 여태까지 말도 못했나. 이런 걸 생각하니 그래, 내일 기자회견에는 이것을 반드시 밝혀야 되겠다.

저희가 사죄배상 요구하는 걸 막았잖아요. 위안부하고 정신대하고 어떻게 같습니까? 위안부는 생명을 걸고 거기 가서 죽은 사람도 많습니다. 이런데 이런 걸 30년을 이용해 왔습니다. 저는 결심했습니다. 내일 기자회견 할 때는 이것을 내가 반드시 밝혀야 되겠다.

일본 그 사람들이 바보입니까? 뭐하러 정신대대책협의회가 위안부 문제를 하는데 거기에 해당하지도 않는데 뭣하러 그 사람들이 사죄하고 배상하겠습니까? 안 한 이유를 저는 알았습니다.

이것 또한 무엇입니까. 사진 한 장만 모르고 해도 법에 걸고 했는데 이것은 위안부 할머니들을 팔아먹었습니다. 팔았습니다. 내가 왜 팔려야 됩니까? 여러분, 생각을 해 보세요.

아들 6형제에 딸 하나입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놓으면 날아갈까, 불면 날아갈까. 아들 6형제인데도 그 불상 많은 데 쌀 한움큼 올려서 엄마가 참외를 감춰서 수야, 이리 온나 해 가지고 부엌 정자에 가서 먹이고 했습니다. 이런 남의 집의 귀한 딸, 고명딸을 밤에 그것도 끌고 가서 대만 신주 가미카제부대를 가서 방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끌고 가서 전기고문과 갖은 칼 가지고 몸을 그어서 이렇게 죽여놨습니다.

이런데 군인이 보니까 그 방에 들어가라고 담요를 드는데 보니까 군인이 하나 앉았는데 거기 들어가라고 해서 안 들어간다고 오는데. 와서는 그냥 머리를 질질 끌고 가서 광 안에 자물쇠 이렇게 큰 게 달렸었습니다. 그걸 팍 떼서 문을 확 열더니 확 밀었습니다. 엎어지면 또 일으켜가지고 발로, 그건 돌덩이보다 더 여문 군화 발이었습니다. 허리를 발길로 차가지고 엎어졌는데 너무너무 배가 찢어져서 아프고, 죽도록 아파가지고 저 잘못한 거 없습니다. 그런데도 잘못했다고 빌면서 살려달라고 했습니다. 이런데 또 머리를 뜯고 앉혀가지고 두 팔을 이렇게 해놓고, 테이블이 있는데 거기에 놓고 여기에 하나 감고 여기에 하나 감고. 지금 머리에, 귀에 소리 납니다. 그때 제가 엄마라고 크게 불렀던 기억이 귀에서 나는지 머리에서 나는지 이것을 어린 나이부터 지금까지, 지금도 납니다. 이래도 이걸 왜 그런지 누구한테라도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정신대대책협의회라면 이걸 밝혀줘야 안 됩니까? 할머니, 어디 갔다왔습니까 해 가지고 밝혀줘야 하는데 한 번도 할머니를 앉혀가지고 저걸 한번 받은 적 없습니다. 그냥 모여 노는데 밥 먹는데도 어디 갔다 왔습니까? 어디 갔다 왔습니까? 그걸 가지고 책을 냈습니다.

93년도부터 서교동에 집이 있었습니다. 책을 놓고 그 책을 6500원에 파는 걸 봤습니다. 그래도 그걸 몰랐습니다. 그런 책 내는 줄 모르고 그것이 당연한가 보다 하고 다니면서 미국으로 어디로 다니면서 제가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증언도 하고 또 정신대대책협의회 박물관을 짓는데 서대문형무소에 짓는다고 했습니다.

그때 박경림 씨하고 저희 큰조카 내외하고 저하고 가서 15만 원을 받고 정신대대책협의회에서 증언을 했습니다. 이러면 그 박물관이든지 대표가 돼 있습니다. 대표라 소리하지 마라. 창피하다 했습니다. 그러면 대표 소리는 안 해도 대표 대우는 해 줘야 될 거 아닙니까. 하지만 끝까지 3월 30일날 제가 전화를 했습니다.

미향 씨, 이러면 안 되지 않나. 한번 오너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기자회견 할란다 했는데 아주 큰소리로 당당하게 기자회견 하라고 해서 제가 5월 7일날 기자회견을 한 겁니다. 이런 등등을 제가 하나하나 말씀을 못 드리겠습니다. 빨리 생각이 안 납니다. 이래서 제가 기자회견을 했는데... 어느 날입니다. 여기 와 있을 겁니다.

소위 국회의원으로 나올 때 전심전력을 다하면서 제가 도와준 건 없지만 가보고 해야 한다는 생각은 했는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저따위 행동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날 저녁에 나갔다가 들어오니까 들어와서 막 있는데 문을 열어달라고 해서 열어주니까 윤미향 씨가 딱 들어오는 거예요.

제가 넘어갈 뻔했습니다, 놀라서. 그러면서 와서 무릎을 꿇고 무슨 말인지 용서? 뭘 용서합니까? 뭘 가지고 와야 무엇이며 가지고 와야 용서를 하죠. 하든가 안 하든가 할 텐데 뭘 용서. 용서? 보니까 엄청나구나. 그것은 검찰에서 할 것이고.

내가 며칠 후에 기자회견을 할 테니 그때 오라고 그랬습니다. 그러고 나갔는데 나가 보니까 소위 교수라 하는 사람들도 있고 여러 사람이 있는데 내가 말을 안 했습니다. 뻔뻔하게 차에 내려가지고 휠체어를 타려고 하니까 뭣이 어떻고? 도대체 뻔뻔하기 짝이 없어요. 이런 사람이 윤미향을 뽑으라고 했답니다. 무엇입니까, 이건?

그래서 윤미향한테 며칠 후에 내가 기자회견을 할 테니까 그때 오라고 하고 나갔는데 나가 보니까 모두 있더라고요. 거기서 무슨 원수 진 것도 아니고 30년을 지내왔습니다. 그랬는데 한번 안아달라고 합디다. 그래서 저는 생각에 그래, 이게 마지막이다 하는 생각을 하고 안아주니. 저도 인간입니다. 사랑은 내리사랑입니다. 30년을 같이 했으니까 원수도 아니고 그런데. 내가 이게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하니까 너무…눈물이 왈칵 나서 제가 안고 울었는데 이걸 가지고 기자님들 좀 부탁드립니다. 명백하게 좀 기사를 내주세요. 그걸 가지고 용서했다, 이런 기사 너무 황당합니다. 그게 아닙니다.

이건 확실하고 명백히 여러분들도 다 책임이 돌아가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이걸 명백하게 하려고 그랬는데 혼자 생각은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걸 그만둬라, 하지 마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있었는데 이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뭐든지 하고 싶으면 하고 팽개치고 하는데 어떻게 30년이나 같이 해왔는데 한마디 말도 없이 마음대로 팽개쳤습니다. 저만 그랬는게 아닙니다.

우리 국민들, 세계 여러분들이 그 데모에 나오십니다. 그분들도 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했었습니다. 이래놓고 또 자기가 사리사욕을 채워서 마음대로 국회의원 비례대표도 나갔습니다. 저는 모릅니다. 저한테 얘기도 없었고 하니까 자기 마음대로 하는 거니까 제가 무엇을 용서를 구합니까. 이름도 성도 없는 용서? 자기 마음대로 했으니까 그것도 자기 마음대로 하든지 말든지 하는 거지. 저한테 미룰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물어볼 필요도 없는데 뭐 때문에 용서를 바랍니까? 그거 아니라도 여러 수십만 가지를 제가 다 말씀을 못 드립니다.

속이고 이용하고.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몇 사람이 받아먹었습니다. 저는 30년 동안 재주 넘었습니다. 그 돈은 몇 사람이 받아먹었습니다. 이런 것도 모르고 무엇을 용서를 바랍니까? 그래서 저는 데모 방식을 바꾼다는 거지 끝내는 건 아닙니다.

김학순 할머니가 시작했고 또다시 새롭게 학생들한테 교육적인 걸 하기 위해서 제가 이걸 바꾼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먼저도 얘기했습니다. 일본과 한국은 이웃나라입니다. 이러면 이 학생들이 결국은 그 나라 주인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 학생들이 알아야, 뭐 때문에 사죄, 배상을 하라고 하는지 알아야 될 거 아닙니까?

일본 아베는 서류만 나오면 불살라버립니다. 그래놓고는 한국이 거짓말한다. 그 학생들한테 물으면 한국이 거짓말쟁이다, 거짓말만 한다. 이렇게 나오니까 그것도 몰라서 그런 거 아닙니까? 우리 학생들도 몰라서 그렇고 일본 학생들도 그걸 모르고 거짓말만 하는 한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한 겁니다. 일본과 한국을 학생들이 서로 왕래하면서 이게 시간이 오래 갈 겁니다. 그래도 이 학생들이 알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너희 한국이 왜 일본한테 배상하고 사죄하라고 하나. 뭐 때문에. 그러니까 이런 걸 얘기하면 그러면 일본 너희는 왜 하지 않나 하면 그게 아니라고 하고 거짓말이라고 하니까 우리는 그 말만 들었다. 한국이 거짓말만 한다 이렇게 해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이걸 학생들한테 가르쳐가지고 시일이 가더라도 서로 왕래하며 친해지면 속에서 할 말도 있고 또 배워야 됩니다. 배워야 알죠. 그래서 제가 짧은 생각인지 모르지만 저로써는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대구에 역사관이 있습니다. 이것도 또한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이었습니다. 이걸 누가 했습니까? 여기 대구에 아주 유명한 최봉태 변호사가 대표로 있으면서 이걸 했습니다. 그래놓고는 지금은 윤미향을 밀고 있습니다. 윤미향을 밀고 있으면서 어느 날 아침에 할머니, 윤미향이 욕하지 마세요.

김복동 할머니 존대받고 있지 않습니까? 일본에 돈을 많이 내고 하니까. 그러면 나비기금이라든지 하는 거 김복동 할머니 이름으로 했다고 김복동 할머니 돈입니까? 어느 날 미국을 가기로 했는데 윤미향이 모금을 했어요. 모금을 600만 원인가 했는데 저한테 하는 말이 전화가 왔어요.

할머니, 할머니는 존대할 사람 아니라고 못 오게 해요. 이것 또한 말이 됩니까? 그러면서 모금을 하라고 했습니까? 제가 간다고 했습니까? 이런 등등. 그뿐 아닙니다. 많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30년 동안 그것만 얘기했는데 줄줄줄 나오는 게 엄청나게 나옵디다, 엄청나게. 말도 못하게 나옵디다. 그러면 할머니들 팔아서 했으니까 택도 없는 거 아닙니까? 왜 위안부 할머니를 자기들이 했습니까? 부정 아닙니까, 이것도. 이것도 죄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도 끝까지 사죄? 무슨 사죄입니까? 김복동 할머니요? 김복동 할머니를 저는 왜 김복동 할머니만 했노 했습니다. 김복동 할머니는 한쪽 눈이 실명입니다. 저보다 2살 위입니다.

실명이고 한쪽 눈 조금 보이는 이 할머니를 끌고 다녔죠, 끌고. 미국으로 어디로 끌고 다니면서 있을 때 잘하고 할머니 있을 때 해야 되는데 고생시키고 끌고 다니면서 할머니를 이용해먹고 그래놓고도 뻔뻔하게 묘지에 가서 눈물을 흘려요?

그건 가짜의 눈물입니다. 병주고 약주고 하는 그것도 죄인데 죄를 모르고 아직까지 이렇게 있는데 그것은 다 검찰에서 밝힐 겁니다. 하지만 정신대대책협의회에서 위안부를 이용한 것은 도저히 용서 못합니다. 이것도 또한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끝까지 제가 나이가 들다 보니 자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학생들을 올바르게 가르쳐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과 한국과 학생들을 교류해서 서로 친하게 지내면서 올바른 역사를 공부해서 위안부 문제 사죄나 배상하는 걸 적시해 놨습니다.

이건 천년이 가도 만년이 가도 반드시 일본이 해야 합니다. 이런 걸 하기 위해서, 이런 걸 가르치기 위해서는 양국간 친하게 지내면서 역사공부를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이 사람들이 꼭 역사의 주인이니까 이분들은 올바른 역사교육을 시켜서 이 억울하고 누명 쓴 우리 위안부 할머니들 해결해 줄 사람은 우리 학생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이렇게 저희는 당해야 되고 늦게까지 산 게 죄입니까? 왜 이렇게 당해야 됩니까? 끝까지 이렇게 당하고 있는 제가 너무 부끄럽습니다. 하늘나라에 가서 할머니들한테 내가 이렇게 해결하고 왔다. 언니, 동생들. 내가 이렇게 해결하고 왔으니 나를 용서해 달라고 빌랍니다.

그래서 그걸 생각하니까 너무 제가 미안하고 한데 저는 하나도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위안부입니다, 위안부. 위안부가 두 가지가 여자입니다. 이것이 저는 세계의 여성분들께 피해를 끼치고 있다고 생각하면 너무 미안하고 부끄럽습니다.

세계의 여성 여러분들, 저희가 위안부지 하지만 여성이라는 그 두 글자가 너무 미안하고 해서 어떻게 하면 이런 것도 내가 미안한 말씀을 드릴 수 있을까 생각을 했는데 이 기회로 해서 모든 여성분들께 정말 미안합니다.

여자이기 때문에 이런 누명도 썼을 것이고 또 여자이기 때문에 여자다, 위안부는 여자다 하는 것 때문에 여러분들도 그런 소리 들으실 겁니다. 그래서 제가 한 사람, 한 사람한테 어떻게 합니까?

이런 기자회견을 통해서 세계 여성분들한테 확실한 위안부가 여러분들 여자라는 두 글자라는 것 때문에 참 죄송합니다 하는 걸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제가 교육을 확실히 두 나라가 서로 왕래하고 친하게 지내가지고 이 역사를 아셔서 억울하고 억울한 위안부 문제를 사죄받고 배상해야, 제가 사죄를 받아야 위안부 누명을 벗습니다.

제가 왜 위안부고 성노예입니까? 그 더러운 성노예 소리를 왜 하냐 그러니까 미국에 들으라고, 미국 사람 겁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이렇게 팔아가면서 뭘 했습니까? 그렇게 하는 줄 몰랐습니다.

저 안성이라고 하는 데도 보니까 나왔는데 쉼터를 화려하게 지어놨습디다. 그래서 윤미향 대표, 위대한 대표. 그 아버님이 사셨다 하더라고요. 이런 거 엄청나게 나왔는데 그것은 다 검찰청에서 밝힐 겁니다.

이 죄를 모르고 아직까지도 큰 소리하고 있는 이 사람들. 죄는 지은 대로 가고 공은 닦은 대로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꼭 이 죄를 물어서 죄를 살려야 됩니다. 살린다고 제가 마음이 풀리는 건 아닙니다. 고쳐야죠. 이 후에 두번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들 벌받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또한 무슨 말씀이 있겠습니까. 여러분들한테 이걸 밝히기 위해서 정말 너무너무 여러분들이 오셨는데 그 장소가 너무 좁습디다. 그래서 제가 해야 되니까 여러분들이 다 오셔가지고 안 가시도록 하기 위해서 제가 이 장소로 바꿨습니다.

기자 여러분들, 부탁드립니다. 꼭 한 말 그대로 해 주세요. 없는 말 추측해서 하는 얘기는 아닙니다. 다분히 저희들을 욕보이는 말씀입니다. 기자 여러분들이 분명히 하시려고 오신 분들이고 이것을 다 옳은 말씀으로 기사를 내주셨으면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는 제가 오늘 장소를 바꾸라 그랬습니다. 바꿔서 여러분들과 같이 앉아서 마지막 얘기를 드리려고 했는데 많습니다.

그 얘기를 들으면 여러분들도 너무 가슴 아파할 거고 해서 제가 요점요점만 얘기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그렇게 아시고 저 지금 정말 죽겠습니다. 너무 죽겠습니다. 그 좁은 데서 만약에 그러면 또 코로나가 퍼졌다고 하는데 저는 걱정이 됐어요.

좁은 데서 하면 안 되겠다 하는 생각에 제가 이렇게 여러분을 큰 데로 모셨습니다. 그 점을 양해하시고 꼭 기사는 있는 그대로 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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