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나더러 사냥꾼이 되라 해요
질주와 군무를 잊어버리고
겁먹은 채 웅크린,
저 갇힌 짐승들을 잡으라 해요
거짓 야성을 연마하라 해요
껍질은 내다 팔아 혼례를 치르고
고기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을 먹이고
신부가 누울 방 한 칸을 차지한
짐승들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아직 시작되지 않은 아늑한 사랑을 위한
신혼의 방을 차리라 해요
인형상자만 한 방 하나 얻기 위해
얼마나 피 흘려야 하는지 몰라
이 도시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
녹슨 동전들을 움켜쥐고 사냥터로 모이는 밤
문도 벽도 지붕도 없는 강으로 가요
고기 맛에 중독된
피 묻은 입, 피 묻은 손을 씻고
피투성이 사냥터를 씻어 내리고
깎아지른 막막 캄캄 바위절벽에
없는 사랑의 기록
찬란한 가난의 암각화를 새기러 가요
시집 <장미키스>
◇최정란= 경북 상주 출생, 계명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계명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3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여우장갑』 『입술거울』 『사슴목발애인』 『장미키스』,<요산창작기금> <부산문화재단창작기금> 2016년 제7회 <시산맥작품상> 2017년 세종도서 문학나눔
<해설> 원래 우주엔 근원이 없고 작용만 있을 뿐이다. 작용과 작용이 서로 부딪치면서, 그것이 가끔 근원으로 보이기도 한다. 시간의 기억이 일으켜 세우는 아침. 같은 듯 다른 날들의 새로움이 설렘이다. 꽃들이 지면서 내게 전하는 말이 있었으니 모든 것은 순간이다. 인간은 언제라도 패배자가 아니다. 자신을 직시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일단 자존심을 내보내자. 살아있는 한,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받아들일 가치가 있다. 치유되어야 할 유일한 것은 내가 붙잡고 있는 후회와 분노이다. 누구나 일단 첫발을 내디디면 그 결과로부터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 본능적으로 다음 발을 내딛게 된다. 그땐 이미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기엔 너무 늦었다. 우리가 사는 이런 시대에서 방향이란, 위로 올라가거나 나락으로 떨어지거나 딱 두개밖에 없다. 가끔 평행선을 긋기도 하지만 그것은 소멸을 의미할 뿐이다. 누구나 평범하기가 제일 힘들다. 하루에도 몇 번씩 물어본다. 나 잘하고 있는 거겠지? 나 이대로 괜찮은 거겠지? 그런데, 이제야 알았다. 그 질문의 대답은 결국 나밖에 할 수 없다는 걸. 그래서 오늘은 말해주려고 한다. “넌 잘하고 있어”. 인생의 미묘한 그림자는, 아침이나 대낮의 눈부신 빛에서는 보이지 않고 저녁 무렵 등불로 비추어야 비로소 보인다. 삶은 계속되고, 아직 꿈 꿀 시간은 많다. 후회가 꿈을 대신하는 순간부터 사람은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인생 내내 헛된 것을 느끼고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하는 것은 분명히 행운이다. -성군경(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