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에 길운 부르는 길상화
사대부엔 염치·절개의 다짐
국가선 신앙 목적으로 사용
투박한 선·해학적인 그림체
과장된 경물·원근법 무시 등
친근감 부르는 그림체 특징
최근까지도 <삼국지연의>에 대한 내용을 재미나게 풀어주는 프로그램을 통해 삼국지의 영웅인 유비, 관우, 장비 그리고 제갈량 등등 등장인물이 다양한 케릭터와 상징성에 지금도 다양한 분야에서 인용되고 있다.
삼국지연의도는 시대가 내려오면서는 사대부들의 고사인물화(故事人物畵) 또는 일반 서민들의 길상화(吉祥畵)로 제작되어 쓰이기도 했다. 이른바 삼국지연의도는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신앙 목적으로 그려져 사용되었다. 또한 삼국지연의도는 <삼국지연의>의 인기가 더해감에 따라, 사대부들의 사상과 행동의 귀감으로 삼기 위한 충과 효 그리고 염치와 절개를 생각하고 다짐하기 위한 고사인물화로 그려져 쓰였다. 더 나아가 〈삼국지연의도〉는 일반 서민들이 그들의 정서에 맞게 효, 재복, 장수 등의 의미를 담은 길상화로 그려져 쓰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의 삼국지연의도(三國志演義圖)는 유래는 처음 관우 사당에 걸기 위한 신앙화(信仰畵)로 제작되었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중심인물인 관우는 민간에서는 충(忠)과 무용(武勇)의 상징으로서 민간에서는 신앙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른바 관우 신앙이다.
이러한 관우 신앙은 임진왜란 조선으로 전해지며 명나라 장수들이 왜군을 물리치는 원조의 조건으로 관우의 신전인 관왕묘(關王廟)를 전국에 설치해 달라고 요구했고, 조선의 조정은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여 다양한 형태의 삼국지연의도가 그려져 봉안이 되었다.
초상화로 유명한 석지(石芝) 채용신(1850~1941)은 일제강점기 초기였던 1912년 관왕묘에 봉안할 삼국지연의도를 제작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임진왜란 때 관우의 신통력으로 왜군을 물리친 것처럼, 삼국지연의도를 통해 일제에 쓰러진 조선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를 바랐던 듯하다.
조선 중기 시대 이후 삼국지연의는 베스트셀러였다. 임진왜란 직후 널리 읽히며 민중의 생활 전반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삼국지연의의 배경을 둔 민화는 관왕묘에 봉안된 삼국지연의도와는 그 성격이나 의미나 달라졌다. 진지한 영웅들의 장엄이나 서사가 아닌 민중들의 친근한 이웃으로서 그들의 정서에 맞게 효, 재복, 장수 등의 의미를 담은 길상화(吉祥畵) 민화로 그려져 발전되었다.
길상화는 주로 서민들이 행복, 출세, 장수 등을 위해 빌고 염원하기 위해 제작하여 사용한 그림을 말한다. 한마디로 민화 삼국지연의도는 서민들이 복을 받고 병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집에 붙여놓는 부적의 의미를 담은 그림을 말한다. 민화 삼국지연의도의 회화적 조형의 특징은 자유, 익살, 해학, 친근감 등으로 정리된다. 즉 길상화 삼국지연의도는 등장 인물들이 누구든 간에 투박한 선과 색채를 사용해 거의 우스꽝스럽거나 해학적으로 그려진다. 즉 대부분의 길상화 삼국지연의도는 등장인물이나 경물이 자유롭게 과장되고, 그들의 상호 비례 관계가 무시되거나 원근이 거꾸로 되어 있어서 왠지 친근감이 든다.
<박승온ㆍ사단법인 한국현대민화협회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