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민특위를 습격한 6월6일 경찰폭력
반민특위를 습격한 6월6일 경찰폭력
  • 승인 2020.06.08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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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열 전북대 초빙교수
6월6일은 누구나 다 아는 현충일이다. 사람들은 6월이 되면 마음이 들뜬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의 봄이 지나가고 벌써 해수욕장을 찾을 여름이 닥친다는 계절의 변화 때문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봄은 이상하게도 국가적인 대변혁을 몰고 다니는 계절이기도 하지만 그 중에서도 여름의 초입인 6월은 수많은 사건을 빚어낸 기록의 달이기 때문이다. 현충일은 나라를 위해서 몸을 바친 선열들의 위대한 뜻을 받들고 그들이 남긴 애국애족의 정신을 후손들에게 길이 알려야 할 책무를 지닌 국민들은 모두 숙연한 마음으로 이 날을 맞이한다.

어느 나라에서나 다 고유의 현충일을 가지고 있으며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수호하기 위해서 피를 흘린 선열들에 대해서 헌신적으로 추모하는 큰 행사를 벌인다. 우리나라는 정부수립 이후 곧장 6·25전쟁을 겪으며 민족상잔의 슬픈 역사를 연출한 덕에 수많은 전사자를 냈다. 이들을 모두 한 곳에 모아 국군묘지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에 앞서 일제강점기에 독립군과 광복군으로 일본과 싸우다가 전사한 분들을 모셔야 한다는 여론에 따라 국립묘지로 이름을 바꿨다가 지금은 현충원으로 자리 잡았다.

현충원은 서울동작동과 대전현충원으로 나눠있지만 그 외에도 임실 여주 영천 등지에 국립현충시설이 있으며 4·19혁명과 5·18민주화운동 희생자를 기리는 국립민주묘지가 서울 마산 광주에 영령들을 모시고 있다. 6월이 되자 여기저기서 기념행사를 열 준비들로 바쁘다. 우선 6월10일이다. 1926년 순종의 인산일을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벌인 중앙중학교를 중심으로 벌어진 만세운동과 사회주의 계열단체가 주동한 두 가닥으로 6·10만세운동이 펼쳐졌다. 서로 연락 없이 각기 만세를 불렀지만 우리는 3·1운동, 광주학생운동과 함께 항일의 3대 만세운동으로 부른다. 세월이 흘러 1987년 6월10일 서울에서는 똑같은 날 신군부정권에 반대하는 국민들의 열화 같은 궐기가 일어났다. 최루탄과 닭장차로 가로막는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학생과 시민들은 뒤엉켜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며 거리로, 거리로 뛰쳐나갔다. 이 운동은 6월29일 전두환정권의 항복 선언으로 승리를 거두며 위대한 6월항쟁 민중승리의 날로 기록된다. 직선제 개헌을 쟁취한 것이다.

참으로 오랜 세월 유신과 신군부의 철권에 질곡을 헤맸던 국민들의 힘으로 민주화의 대로를 연 것이다. 그러나 막상 대통령선거에서는 김영삼 김대중의 분열로 신군부의 주역인 노태우에게 대통령 자리를 헌납하는 참혹한 배신을 경험해야만 했다. 이처럼 6월의 하늘은 밝았다가 어두워지는 역사가 반복되었지만 끝내 우리는 민주화를 성취하고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하여 세계의 본보기가 되었다. 다시 돌아온 6월은 현충과 보훈의 달이다. 나라를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생명조차 아끼지 않았던 선열들의 충성심을 떠받들어 그들에게 긍지를 느끼게 하고 유족으로 하여금 자랑스러운 조상으로 모실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 정부와 국민 모두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애국심이다. 현충과 보훈은 언제나 쌍두마차처럼 하나로 이어진다. 꼭 현충일이 아니어도 먼저 가신 선열들을 추모하고 우리 자신도 언제든지 선열들의 뒤를 따를 수 있다는 각오를 다지는 달과 날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금년 현충일 행사는 대전현충원에서 코로나 거리두기로 축소거행 되었는데 뭔가 찜찜한 일이 벌어졌다.

대통령이 헌화 분향할 때 4·19혁명 3개단체의 대표를 제외시킨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14개 보훈단체는 현충일의 주인격이다. 해마다 대통령을 수행해 헌화 분향에 참여해왔다. 4·19혁명 공법단체로서의 의무 권리를 박탈한 국가보훈처의 처사는 책임 있는 해명과 사과가 필요하다. 왜? 무슨 이유로 제외시켰는지 납득할 수 없는 행패다. 한편 이 날 서울 중부경찰서 앞에서는 71년 만에 처음으로 반민특위를 습격했던 경찰의 만행을 규탄하고 경찰청장의 사과를 요구하는 광복회주관의 대회가 개최되었다. 정부가 수립된 후 제헌국회에서는 맨 처음 ‘반민족행위자 처벌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이에 따라 반민특위가 구성되어 일제에 협력했던 친일인사들을 체포 재판에 회부했다. 이 때 이승만은 치안유지를 이유로 일제경찰을 그대로 기용했는데 악질경찰 노덕술이 높은 자리를 차지했다. 그는 반민특위의 칼날이 자신을 겨냥하자 이승만의 내부결제를 받아 중부경찰서장 윤기병으로 하여금 50명의 경찰을 동원하여 반민특위를 박살낸 것이다. 1949년 6월6일은 민족의 역사를 바로 세울 수 있는 반민족행위자를 처벌할 수 있는 기회를 경찰폭력에 의해서 와해시킨 치욕의 날이다. 71년 만에 처음으로 이를 공론화시킨 광복회(회장 김원웅)는 이제 시작일 뿐임을 직시하고 끝까지 진상규명에 진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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