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스페이스 루모스, 박찬원 ‘사랑한다 루비아나’展
아트스페이스 루모스, 박찬원 ‘사랑한다 루비아나’展
  • 황인옥
  • 승인 2020.06.14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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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경주마, 나 보는 듯”
눈 오든, 비 오든 ‘동고동락’
사라지는 생명의 모습 포착
사진·글 담긴 책 함께 소개
박찬원-프로필02
제주에서 만난 말(馬)인 루비아나를 통해 ‘삶과 죽음, 인간을’ 녹여낸 사진작가 박찬원이 아트스페이스 루모스에 걸린 루비아나 사진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아트스페이스 루모스 제공

짧은 만남에도 ‘사랑’으로 묶이는 인연들이 있다. 사진작가 박찬원은 작업노트의 첫 구절을 ‘사랑한다 루비아나’로 시작한다. 그에게 루비아나는 사랑으로 묶여진 친구다. 루비아나라는 사랑스러운 이름만 들으면 연인인가 싶지만 사실은 경주마에서 퇴역한 말(馬)이다. “루비아나를 처음 본 순간 전율이 왔어요. 마치 저의 분신 같았죠.”

눈이 부신 흰색 피부를 가진 루비아나는 명마(名馬)의 삶을 살았다. 젊은 시절 미국에서 경주마로 살았고, 우승을 3번이나 하며 환호를 받았다. 은퇴 후에는 우리나라로 씨받이로 팔려 와 새끼를 8마리나 출산했다. 그러나 9번째 출산 중에 새끼가 잘 못되고 이후 다시 임신을 하지 못하게 되자 안락사 위기에 처했다. 그때 박 작가를 만났고, 루비아나는 안락사의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목장주에게 사료비를 주겠으니 안락사 시키지 말고 키우자고 부탁을 했더니 선선히 승낙해 주었어요. 루비아나의 구사일생이었죠.”

박찬원은 루비아나를 만나기전까지 하루살이, 나비, 돼지 등의 동물들을 촬영해왔다. 이들 동물 사진을 촬영하며 “생명의 의미와 생명의 가치”를 찾았다. 첫 동물 피사체는 하루살이였다. 하루를 억겁의 시간처럼 살다가는 하루살이를 통해 삶과 인생의 의미를 발견했다. 이후 돼지 사진으로 옮아갔다. 인간의 먹잇감으로 6개월간 사육당하고 기꺼이 자신의 몸을 희생하는 돼지를 통해 희생과 생명, 순결, 박해 등의 의미를 발견해 갔다. 그는 돼지 작품으로 ‘돼지 작가’라는 수식어를 얻기도 했다.

“돼지 사진을 찍기 위해 돼지를 오랫동안 관찰하면서 사람이 돼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돼지가 사람을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측은한 눈으로 탐욕과 시기와 비난과 상처로 가득한 인간에게 ‘꿀꿀꿀 끌끌끌~’하며 측은하게 바라보는 것 같았죠.”

말(馬)은 동물 사진의 연장이다. 루비아나를 만나는 순간 그녀와는 하루살이나 돼지와는 다른 특별한 교감이 가능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말을 영물이라고 한 것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루비아나를 만나는 횟수가 늘어갈수록 실감했다. 박 작가는 루비아나의 진짜 친구 되기에 돌입했다. 틈만 나면 함께 시간을 보며 영혼과 영혼의 교감을 이어갔다.

사실 루비아나는 외로웠다. 몸은 병들었고, 영혼마저 흐릿해졌다. 윤기없는 털은 낙엽처럼 바스락거렸고, 근육이 빠져나간 다리는 풀이 죽었다. 경주는 과거의 영화로 끝이났고, 새끼를 출산하는 일도 더 이상 불가능해진 루비아나를 반기는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목장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루비아나를 찾는 이는 오직 목장주뿐이었다. 그는 하루에 두 번 루비아나에게 먹이를 공급하기 위해 목장을 찾았다.    

외로웠던 루비아나에게 박 작가와의 만남은 선물과도 같았다. 박 작가가 목장을 찾으면 루비아나와 새벽부터 밤까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인간 못지않은 굴곡 많은 삶은 살아온 루비아나와 사업가로 화려하게 살았던 박 작가와는 찰떡같은 대화가 이어졌다. 박 작가는 사진작가 이전에 사업가의 삶을 살았다. 비록 동물과 사람과의 만남이었지만 이들의 만남에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물론 영혼과 영혼의 소통이었다. 

“명마로 화려한 인생을 보내고 생의 마지막에 선 늙고 초라한 루비아는 저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점차 저에게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주었어요.”

박 작가는 동물사진을 찍을 때 총 100일 동안 촬영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피사체의 일상을 순수하게 담아내기 위해서 적어도 100일 정도는 지켜봐야 한다는 소신이 있었다. 루비아나와 허락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생의 끝자락에서 만난 인연. 작가와 루비아나에게 허락된 시간은 7개월 남짓이었다. 그 짧은 시간동안 루비아나의 일상을 카메라에 담았다.

폭풍우 치는 빗속의 루비아나, 세찬 눈발이 성긴 털 위에 흩날리는 루비아나, 작열하는 태양에 숨을 헐떡이는 루비아나를 찍으면서 작가는 루비아나의 자연을 대하는 태도를 발견하고, 경외심을 가졌다. “루비아나는 자연 환경이 어떻게 달라져도 의연했어요. 피하려 하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들였어요. 자연에 동화하는 루비아나의 태도에서 자연을 지배하려는 인간의 교만이 더 뚜렷하게 보였죠.”

루비아나의 사진 중에는 죽음의 순간도 있다. 그러나 이 사진은 루비아나가 박 작가에게 준 선물이었다. 작가와 함께 있던 어느 날 루비아나는 쓰러졌고, 이내 숨을 헐떡였다. 마지막임을 직감한 박 작가는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또 눌렀다. 그의 손은 떨렸고, 가슴에서 찬바람이 일었다. “말은 평생을 서서 살아갑니다. 바닥에 누울 때는 죽을 때뿐이죠.”

루비아나는 기진맥진 해 고개를 들 힘도 없었지만 박 작가를 위해 죽음을 연출해 주었다. 덕분에 말이 죽는 모습, 죽은 후의 모습, 다시 살아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하지만 루비아나는 그날 다시 일어났고, 2개월 후에 혼자 생을 마감했다.

“루비아나가 제게 죽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죽는 모습을 촬영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미리 연출해 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박 작가는 동물들을 통해 자신을 발견한다. 동물 사진을 찍으며 ‘생명이란 무엇이며,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하고 성찰한다. 이를 통해 ‘늙음과 죽음’의 의미를 찾아간다. ‘왜 동물이었나’를 물었을 때 그가 “이 세상을 사람의 기준에서 보면 사람세상이지만 동물의 기준에서 보면 동물세상이라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에 대한 성찰의 시간이기도 하다”고 고백했다.

“피사체를 관찰하는 긴 시간 동안 동물이라는 피사체를 바라보는 동시에 나와 인간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동물을 통해 나를 보고, 나를 통해 동물을 보는 것이죠.”

지난달 30일에 아트스페이스 루모스에 루비아나 사진들이 걸렸다. 그녀가 다른 세상으로 떠난 지 3년이 되는 날이었다. 전시에는 사진과 함께 루비아나와 함께 하며 느낀 감정들을 글로 담아 사진과 함께 출간한 책도 함께 소개되고 있다. “이번 전시는 루비아나에 대한 추모이자 저를 돌아보는 전시에요. 내가 아름답게 늙기를 바라는 소망도 담겼어요.”

박찬원은 사진가이자 수채화가이자 수필가다. 나비, 돼지, 말 등을 소재로 한 동물사진전을 9번 개최했고, 20여회의 수채화 그룹전에 참여했다. 최근에는 한국산문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했다. 박찬원의 ‘사랑한다 루비아나’전은 내달 5일까지. 053-766-3570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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