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
빗소리
  • 승인 2020.06.15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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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란
주부
깊은 잠에 빠졌는데 과음을 한 남편이 침대위에서 뒹굴다가 “어~~” 소리를 내더니 “툭~”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얼마나 아플까 싶었는데 만취상태로 숙면에 들어서 무감각한지 그냥 잤다. 그 때부터 잠이 오지 않았다. 새벽쯤이라 집 안도 아파트 단지도 조용했다. 그 때 갑자기 빗소리가 아주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듣기 좋았고, 홍희를 상상의 세계로 끌고 갔다.

시골 고향집에 살 때 비가 오면 마당으로 빗방울이 튀었다. 지붕위에서 고인 빗물은 처마 끝으로 떨어졌다. 밖에 두었던 스텐레스 세수대야에 경쾌한 실로폰 소리같은 ‘두두둑 딱딱’ 소리를 냈다. 비가 오기 시작한다는 신호다. 부모님은 농사 장비와 거두어 들인 곡식이 비에 젖지 않도록 처마 밑으로 옮기고, 큰 비닐을 찾아 덮었다. 빗소리는 비닐 위에도 툭툭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비가 와서 농사일을 나가지 못하고 놀러 온 동네사람들과 아랫방에서 말하는 아버지의 목소리와 부엌에서 음식을 만드는 달그락거리는 소리는 빗소리와 잘 어울렸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끌벅적하는 만족감이 몰려왔다. 홍희에게 ‘비’는 ‘쉼’이었다. 그래서인가 홍희는 비 오는 날을 좋아했고, 빗소리를 좋아했다.

중학교 교과서에 단편 소설 ‘소나기’가 실려 있었다. 새 학기 교과서가 나오면 늘 국어책에서 소설을 먼저 골라 읽었다. 수능에서 비문학은 상상이나 감정이입을 해서는 글의 논리를 따라잡기가 어려운데 자신은 자꾸 이 생각 저 생각 하게 된다는 아들처럼, 홍희도 글에 푹 빠져 드는 경향이 있었다. ‘소나기’는 그 때 읽는 느낌이 아직까지 생생히 기억에 남는 소설이다. 개울가에서 만난 소년과 소녀가 산으로 놀러 가서 만난 소나기 때문에 손에는 꺽은 들꽃다발을 들고 몸을 피하려 수수밭 수숫단 더미 속으로 몸을 숨기고, 둘이 함께 웅크리고 앉아잇는 모습이 특히 오래 기억에 남는다. 서로에게 따뜻한 체온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되도록 한 소나기였다. 물론 소녀가 죽어 너무 가슴 아팠지만. 수업 시간에도 터져나오는 울음을 참느라 참 힘들었다. 소나기가 준 애틋한 설레임이 그 때부터 생긴 것 같다. 비가 오면 왠지 로맨틱한 연애가 시작될 것 같은 환상말이다.

친구들과 친구 마을로 놀러 간 적이 있었다. 소똥만 굴러가도 까르르 깔깔 웃던 때였다. 특별히 뭘 한 것도 아니었지만 낯선 동네를 간 것이 먼 여행을 떠난 것처럼 신났다. 우르르 어울려 다니던 중 비가 왔다. 친구 집에는 친구들에게 나누어 줄 우산은 없었다. 들을 뛰어다니다가 밭에 토란이 있는 것을 발견했고, 토란을 꺽어 우산처럼 뒤집어 ›㎢ 토란 잎 위로 또르르 빗방울이 떨어졌다. 모든 비를 피할 수는 없어 비는 팔을 적시고, 옷을 적시고, 머리도 적셨다. 여름날이라 빗줄기는 춥지 않고 시원했다. 흠뻑 맞았다. 그래서인가 가끔 비가 오면 우산을 쓰지 않고 비를 맞고 싶을 때가 있었다. 20대까지는 말이다.

20대, 홀로 타지, 그것도 공단지역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쇳소리와 트럭소리, 계산기 두드리는 소리가 일상을 지배했다.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밖으로 나갔다. 동네 한 바퀴 걸었다. 마치 누군가 만날 약속이라도 있는 것처럼 보이려고 애쓰면서. 그리고 바다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고 싶어 바다로 가기도 했다. 빗소리와 파도소리를 들으며 파도위로 빗방울이 떨어져 바닷물로 녹아내려 파도가 되는 모습이 뭔가 모를 의미가 있어 보였다.

사람들이 자는 새벽에 홀로 깨어있으니 참 오랜만에 빗소리만 집중해서 듣는다. 빗소리가 마음을 평안히 해주고, 스트레스를 떨칠 수 있도록 해준다. 소위 힐링이 되는 소리다. 음악소리처럼 말이다. 소리로 사람을 치유할 수도 있고, 사람을 해칠 수도 있다. 홍희는 빗소리로 힐링이 되는 것처럼 좋은 소리를 내는 사람이 되고싶다는 생각을 했다. 내 귀에 들리는 말소리, 남의 귀에 들리는 말소리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고 기쁨의 소리가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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