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제도는 가치를 담고, 좋은 행정은 국민의 마음을 담는다
좋은 제도는 가치를 담고, 좋은 행정은 국민의 마음을 담는다
  • 승인 2020.06.22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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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경
한국애드 대표
지난 1월 29일, 환경부는 제품의 과대포장을 방지하기 위한 ‘자원재활용법 하위법령’을 개정·공포했다. 7월 1일부터 시행한다고 발표한 이 법령은 “제품 판촉을 위한 1+1, 묶음 상품 등 불필요한 비닐 재포장을 퇴출한다”라면서 불필요한 포장을 막겠다는 환경부의 의지를 담았다. 이후 환경부는 개정된 ‘자원재활용법 하위법령’이 시행되는 7월 1일을 앞둔 지난 6월 18일, 유관 업계 간담회에서 ‘포장제품의 재포장 관련 가이드라인(안)’을 배포했다.

가이드라인(안)이 언론에 소개되자 논란은 불처럼 일어났다. 분명 불필요한 비닐 재포장을 퇴출하기 위한 제도임에도 그러한 목적이 보이기는커녕 묶음 할인을 허용하지 않는 제도로만 보였기 때문이다. 가이드라인에 명시된 예시에 따르면 2,000원 판매제품 2개를 묶어 2,000원에 판매할 경우 재포장에 해당한다. 2,000원 판매제품 2개를 묶어 3,000원에 판매할 경우에도 재포장에 해당한다. 하지만 2,000원 판매제품 2개를 묶어 4,000원, 3개를 묶어 6,000원에 판매할 경우 종합제품으로 분류되어 재포장에 해당하지 않는다. 결국, 할인하면 재포장이고 할인을 하지 않으면 재포장이 아니라는 말이다. 게다가 재포장이지만 예외인 경우로 “판촉(가격 할인 등)을 위한 것이 아닌 경우”를 명시하고 있다, 불필요한 재포장이 판촉용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아서 그렇게 표기했을 것이라 이해한다 해도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마트에서 흔히 보이는 묶음 할인 상품이 사라지게 될 것임을 짐작하기에 충분했다.

가이드라인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온라인 맘카페에서는 “환경오염에 대한 대응은 필요하지만 일방적인 할인금지 조치는 너무하다”라며 분통을 터트리는 목소리가 높았다. 사실 분유나 기저귀는 물론 우유나 라면, 햇반을 물론, 치약이나 휴지, 샴푸까지 ‘1+1’로 구매하는 수많은 제품은 그동안 가계에 많은 도움이 되었으니 같은 제품이라면 묶음 할인제품을 사는 건 당연했다. 마트에 가면 진열대 앞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온라인 쇼핑몰과 가격 차이를 검색하거나, 스마트폰의 계산기 앱을 열어 개당 단가를 비교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만큼 소비자들은 생필품의 가격에 민감하다. 같은 묶음 상품이라도 보다 더 저렴하게 사고자 하는 것은 소비자 누구나 같은 심리이다. 실제로 햇반의 경우 210g 1개의 정가가 1,580원인데 비해 8개 묶음은 8,980원이다. 8개 묶음의 경우 1개당 1,120원인 셈이다. 게다가 환경부의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유통산업발전법」 제2조 제3호 및 [별표] 제1호에 따른 대형마트 중 창고형으로 운영되는 매장에서 대량 판매하기 위해 불가피한 경우”는 재포장이지만 예외인 경우에 해당하므로 묶음 할인 상품의 판매가 가능하다. 이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앞으로 8개 묶음의 햇반을 사기 위해서는 창고형 매장을 방문해야 한다.

십 분 양보해서 환경부가 배포한 가이드라인이 업계 관계자들과 7월 1일 시행될 제도의 세부 시행안을 도출하기 위한 간담회를 위한 자료이었으니 보다 정교하고 합리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고 봐주자. 하지만 7월 1일 시행을 앞두고 6월 18일에 진행된 간담회의 자료라면 이미 큰 틀은 모두 그렸어야 한다. 지난 1월 29일 관련법의 개정·공포 이후 4개월이 훌쩍 지나서, 제도의 시행을 10여 일 코앞에 두고 만들어 온 결과물치고는 너무나 짜임새가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논란이 가열되자 환경부는 적극 해명에 나섰다가 이 또한 명확하지 못해 논란이 되자, 6월 18일 이후 4일 만인 6월 21일, “‘제품의 포장 재질·포장방법에 관한 기준 등에 관한 규칙’의 세부 지침을 이해관계자 의견을 들어 원점 재검토한 이후 본격 시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당장 마트로 달려가 묶음 상품 사재기라도 해야 하나’ 고민을 했던 참으로 시끄러운 주말이었다. 한편으로는 헛웃음이 났다. 지난 1월에 개정된 법을 제도화하기 위해 5개월의 기간이라면 충분히 가이드를 만들고 고칠 수 있는 시간이다. 표본 매장을 대상으로 시범 운영도 가능했을 것이다. 코로나19로 온 나라가 정지해 있었다는 핑계는 하지 않기를 바란다. 오히려 코로나19로 환경에 대한 국민의 관심은 높아졌다. 불필요한 일회용품을 줄이기 위해 비닐봉지의 사용을 제한했을 때만 해도 이렇게 큰 논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환경을 위해 어느 정도 불편을 감수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원점에서 다시 검토한다는 ‘제품의 포장 재질·포장방법에 관한 기준 등에 관한 규칙’에도 국민이 이해하고 참여할 수 있는 가치가 담겨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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